리베카 솔닛의 문장은 좋다. 그러나 이 책 내용 대부분이 미국의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이슈를 배경에 깔고 그 사회를 성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는 내겐 일정 부분 '추상적으로' 다가오고 글의 정확한 메시지가 읽히지 않는다. 그러면서 든 생각. 솔닛의 책은 번역되고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중대한 과도기에 있고, 얼마나 복잡다단한 이슈가 많은데, 이를 제대로 성찰하는 글은 보기 어려운 것일까. 소설가들의 소설 외 글쓰기의 경우에도 신변잡기적인 에세이나 여행기는 보았지만 사회를 깊이 성찰하는 글은 잘 못 본 듯하다. 다시 말해 저널리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그런 글을 만나기가 어렵다. 한국 지식인들이 글을 쓰지 않는 것인가? 출판이 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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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절망은 많은 원인이 있고 종류도 다양하다. 공식적인 견해를 까뒤집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좌파들도 있다. 임금님이 발가벗었다고 말하는 건 근사한 반권위주의적 언사지만, 모든 것이 예외 없이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건 대안적 전망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잘돼가고 있다"는 주류의 견해를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실패와 주변화는 안전하기도 하다. 미국을 움직여나가는 보수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포위당한 국외자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그렇게 함으로써 현상황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과 변화를 불러올 자신들의 능력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며, 더구나 스스로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은 자기 패거리를 불러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힘과 가능성을 부인하는 행동가들도 자신들의 의무를 떨쳐버리는 선택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약 지고 말 운명이라면, 스스로를 멋들어진 패배자 또는 최소한 고결한 패배자의 위치에 놓는것 말고 그드은 그다지 많은 것을 하려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정교한 이론을 떠벌리는 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결코 흔들림이 없고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초인적 능력을 자신들의 적에게 부여한다. 그들은 자신을 결코 놓아주지 않는 적의 존재에--그 적이 설사 부분적으로는 그들 스스로 빚어낸 환상과 고착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사로잡힌 듯하다. 절망을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인 양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억압받는 사람이라 해도 희생자가 되기 전의 삶이 있었을 것이고 또 희생자 상태를 벗어난 삶을 희망할 법하므로, 그런 식의 유별난 취급을 원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암울함은 선물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로 절망에 빠졌으면서도 그것을 정치적 분석의 결과로 투사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는 이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거나 사람에 따라서는 끔찍했다고 여길 수도 있는 시절에 대한 향수와 결합돼 있기 일쑤인데, 그런 시절은 지금은 망가져버린 모든 것이 한때 온전했던 것으로 상상될 수 있는 자리다. 그건 자기 성찰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
희망은 문이 아니라 어느 지점엔가 문이 있으리라는 감각, 길을 발견하거나 그 길을 따라가보기 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딘가 있으리라는 감각이다. 때로 급진주의자들은 문을 찾지는 않고 벽이 너무 거대하고 견고하고 막막하고 경첩도 손잡이도 열쇠구멍도 없다고 벽을 비난하는 데 안주하거나, 문을 통과해 터벅터벅 나아가면서도 새로운 벽을 찾아댄다. 블로흐는 희망은 실패보다 성공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좌파 가운데 목청을 높이는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그 말이 해당하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좌파는 지배문화의 이면에 해당되는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고, 주류매체가 결코 다루지 않는 이야기는 그들도 잘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뉴스는 의외성과 폭력성, 재앙 쪽에 편향돼 있고, 대중의 힘이 가장 흔히 드러나는 방식인 고조되는 여론, 뜻밖의 변화, 대안적 현상은 간과한다. 좌파의 암울한 전제인즉슨 지배 세력은 총체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진실도 불완전하긴 마찬가지다. pp7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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