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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by 릴라~ 2018.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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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 욕망은 젊은/부잣집/도련님에게나 가능하다. 그것은 성 해방이며 인간의 성장과 창조를 촉진한다. 자기 세계를 넓히기 위한 남자의 모험이다. 그러나 힘없는 자의 욕망은 역겹거나 최소한 심한 불편함을 준다.(노인의 성과 사랑의 '욕망'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을 보라.) (...)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부르주아는 히피요 문화적 전위지만, 가난한 자가 그렇게 한다면 단지 초라할 뿐이다.


남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쾌락이요 전복이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 성욕이다. 여성이 마조히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마조히즘을 욕망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p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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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억업자(특히 여성일 때)의 사회심리적 특징 중 하나는 불안한 미래의 행복보다는 현재의 확실한 불행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다. '행복'은 아무나 즐기는 것이 아니다. (취약한) 여성들은 관계에서 오는 긴장, 관계를 통제(해야)하는 자기 권력을 견디지 못한다. 상대 속으로 들어가거나 상대가 내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자아 경계의 충돌과 협상이 주는 긴장이 해소되길 바란다. 여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기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자아를 없애려면? 사랑하는 사람의 폭력의 대상이 되어 '그대 가슴에 물들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여주인공이 원한 사랑이었지만 그녀의 젠더는 이러한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성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가 없다.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가? 이건 내가 강연에서 답하지 못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p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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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문제 전문가, 아니 '문제 여성' 진단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 땅의 남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조선 시대에 비하면 여자들 사는 게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인간(남자)의 삶이 중세에 비해 나아졌기 때문에 더는 투쟁하거나 진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없다. 여성의 지위는 같은 시대, 겉은 계급의 남성과 비교되지 않는다. 2010년대 여성의 지위는 2010년대 남성의 지위와 비교되지 않고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되며,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되지 않고 노동 계급 남성과 비교된다.


여성은 동시대 남성이 소유한 동산에 불과하기 때문에, 동일한 계급의 남성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역사의 진보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현실적인 주체가 아니라 재현되는 기표이자 대상이기 때문에 시간의 변화와 상관없다. 그래서 여성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의 다름이라는 비교 맥락을 무시한 채, 몰역사적으로 비교된다. p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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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인간의 본질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시대도 지났다. 지금은 모두가 한목소리다. 세상이 너무 나빠졌으며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착한 사람'의 개념은 완전히 무너졌다. 선함은 순진함, 무능력, 멍청함, 부적응, 루저, 답답한 인간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선함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함은 위선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착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별로 없으며, 그런 말을 들으면 화를 내는 사람(특히, 여성)도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믿었던 선함의 의미를 모르겠다. 몸매가 착하다, 가격이 겸손하다, 착한 여행 같은 말에 '착함'이 사용되는 시대다. 내가 생각하는 착함은 자기 역량이 가능한 수준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조금 이타적인 마음, 딱이 정의롭다기보다 정의를 추구하는 태도,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가짐...... 정도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즘, 이런 착한 사람들은 냉소적이거나, 분노 조절을 못하는 '아픈' 사람이 되어 병원(신경정신과)에 다니거나, 타인을 붙잡고 한없이 하소연을 하는 민폐 캐릭터가 되었다. 나쁜 사람보다 그들에게 당한 사람을 더 싫어하는 세상이다. 나름 착하게 혹은 최소한 상식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타인에게 이용당하거나 속거나 근거 없는 모욕을 당했을 때, 그러한 사건이 반복될 때 변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다르게 질문하고 싶다. 변해야만 정상일까. 그렇게 당했는데도 같은 방식을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착한 것이 아니라 멍청하다고 하는 것이 정녕 맞는 논리인가? 나쁜 사람이 변해야지, 왜 착한 사람이 변해야 하나? 착한 사람이 미치고 아픈 것은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내가 늘 주장하는 대로 '착한 여자'와 '착한 여자 콤플렉스'는 반대말이다.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착한 여자지 나쁜 여자가 아니다. 불평등과 착취는 부정의하다. 착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은 이에 반대한다. 저항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우리'를 나쁜 여자들이라고 한다면 사회가 잘못이지, 우리가 굳이 나쁜 여자라고 되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pp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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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가정 폭력이나 여아 낙태 문제가 영화로 만들어져 전 세계에 방영된다면 <더 스토닝>이 불러일으킨 반응과 비슷할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성폭력이나 인신매매도 잔인하긴 마찬가지지만 서구는 여성 문제 외에도 정치, 범죄, 농업,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에 여성 폭력이 사회 문제의 일부분으로 인식되지만 '후진국'의 여성 현실은 그 사회의 미개한 본질로 간주된다. (...)


현실의 재현은 종종 현실을 대상화해, 현실로부터 인간을 분리해낸다. "우리는 아니다."라고 안도하거나 마치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사실처럼 '충격'만 받는 것이다. 심지어 이란 사회 내에서도 이런 일은 '시골'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유대인 학살은 근대성의 모순이고 돌팔매질은 봉건적인 관습인가? 과도한 다이어트로 사망하는 서구 여성은 차도르를 둘러야 하는 여성보다 더 자유로운가? 이는 오래된 논쟁이다. 이슬람(아시아, 아프리카...) 여성이 마주한 폭력의 현실을 '비서구' 사회 야만성의 상징으로 인식한다면, 그건 새로운 식민주의다. pp1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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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현실에서 쿠르드 아이들은 팔과 다리를 잃은 채 물을 찾아 지뢰밭을 헤맨다.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소녀는, 부모를 죽인 이라크군에게 강간당해 아이를 출산한다. 이들에게 '모성'이나 '어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너무나 끔찍해서 언어의 대상으로 삼기는커녕 무의식에서조차 떠올리기 힘겨운 전시 강간은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전쟁 후에도 성폭력은 계속된다. 그러나 어느 사회나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성폭력의 고통을 인간 삶의 일부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쿠르드 소녀의 고통처럼 전쟁은 성별적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 명예의 저장소이자 영토, 혈통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남성 집단 간 전쟁터가 된다. 여성의 신체 기관이 공간의 명칭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궁'은 아들이 사는 곳을, 영어의 버자이너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칼이 머무는 '칼집'을 의미한다. 질의 한자 역시 방이라는 글자를 포함한다. 남성 문화는 '자기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다른 남성 집단에 속한 여성의 몸을 침범(강간, 납치)함으로써 남성성을 경쟁한다. 이러한 의미 체례로 인해, 근대전의 특징인 절멸 전쟁에서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과 강제 임신은 '인종 정화'로 합리화된다.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을 의미한다.


1995년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위원회에 참가한 인권 단체들은 제네바 형장이 강간을 '명예를 침해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음을 비판한 바 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성폭력을 인간에 대한 고통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남성 공동체의 명예 훼손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강간당한 여성은 자신이 속한 남성 공동체가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피해를 숨기고 침묵해 왔다.


'침묵당함'은 또 다른 폭력이다. 상처를 숨기는 대신, <거북이도 난다>에서처럼 고통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 자기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간헐적' 폭력이라면, 전쟁과 평화의 분리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폭력이다. 영화는 피 흘리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절박하게, 일상적 폭력을 평화라고 믿는, 침묵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영화다. 참혹함과 아름다움은 양립할 수 있다. pp15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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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이 참혹한 한국 현대사에서 전쟁과 국가 폭력의 희생자는 극단적으로 성별화된 주체이기도 하다. 역사의 주체이자 행위자로 간주되는 남성은 장기수 '선생님'이고, 남성 역사의 부산물로 간주되는 위안부 여성은 비정치적인 존재로서 '할머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남성 담론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은 민족의 수치이며, 국가 간 전쟁이 만들어낸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피해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장기수 남성은 '의미 없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피해자'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정치적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서 인간 의식의 가장 정화된 형태를 보여주는 주체 중의 주체이다. '빨갱이'로 불리는 것조차 그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웅변한다. 아직도 레드 콤플렉스와 연좌제의 고통에 떨고 있는 가족을 수십 년 만에 만난 어느 장기수가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반북 반공 이데올로기에 찌들어 있는 너희 의식을 해방시키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들의 '과잉 주체성'의 절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전향 장기수는 남성 사회가 지향하는 중요한 가치인 현실 초월성, 절제와 극기의 고결함을 체헌한 가장 아름다운 남성이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밥을 짓고, 관계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며, 항상 타인을 걱정해야 하는 여성들은 도달할 수 없는 가치이다. 물론 이러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남성은 남성들 중에서도 중산층, 지식인 남성에 국한된다. (...)


나는 피델 카스트로보다 체 게바라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스무 번의 혁명보다 한 번의 발전이 더 힘들다."고 고백한 카스트로에게서 훨씬 더 치열한 혁명 정신을 발견한다. 모든 '악'과의 전면 단절을 제시한 체 게바라의 입장은 매우 투명하고 단순 명확하다는 점에서 근대적이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체 게바라의 높은 수준의 의식, 엄격한 도덕성, 이타주의적 품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에 몸담지 않은 극소수 남성 혁명가만이 실현할 수 있는 가치이다. 만일 체 게바라가 살아서 계속 쿠바 혹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이끌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노선은 너무나 원칙적, 금욕주의적이어서 더 억압적이고 고립적인 체제의 형성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pp174-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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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는 위안부 '할머니'의 대상화, 탈성애화 문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인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낮은 목소리>가 위안부 여성을 피해자화, 타자화했다는 뜻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감독이라 할지라도 감독과 정신대 피해 여성 사이에는 동일시가 불가능한 거리가 애초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 감독 역시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가 비가시화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남성 사회의 여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군다나 남성의 시각이 깊게 침윤된 전시 성폭력 이슈를 여성의 시각에서 다루고자 할 때는, 기존의 자기를 버리는 뼈를 깎는 훈련과 새로운 감수성이 요구된다. 이는 그 자체로 자신과 세상에 대한 투쟁이 된다. 우리는 모두 그 과정에 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이자 재현 주체인 감독과 피해 여성이자 재현 대상인 '할머니'가 구분될 수밖에 없다. <낮은 목소리>의 '할머니'들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세대인 '젊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감독이 자신의 고통 경험을 이해하리라 기대하지도 않고, 감독과 자신을 여성 범주로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송환>에서는 감독과 장기수 사이에 이런 거리가 없다. 감독이 반공주의자가 아닌 한(혹은 반공주의자라 할지라도) 감독과 장기수는 "모두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남성이 되는 과정에서는 남성 내부의 타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감독은 정신대 '할머니'를 타자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적어도 장기수에 대한 남성 감독의 태도처럼 존경하거나 거룩한 존재로 우러러보기는 힘들다. 반면 정치 의식이 탁월한 남성 감독에게 장기수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동지이며, 감독 자신과 연장선상에 있는 같은 민족 (물론 남성) 구성원이다. 남성과 여성의 역사는 출발선이 각각 다르다. 남성은 새로 시작할 필요 없이 '아버지'의 어깨 위에 앉아 여성이 배제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전수받으며 세계를 조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지배 언어가 일치한다. 그들은 언어가 없어서 고통 받을 필요가 없다. 장기수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시선과 동질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걸출함은 수천 년간 진행되고 있는 남성 사회의 인식론에 상당 부분 '편승'한 것이고, 그 물적 토대는 타자화된 여성 집단의 외로움, 노동,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송환>을 여성사로 읽는다. pp178-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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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아버지의 시선 때문에 뛰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시선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가. 서구? 일본? 전통? 이제는 외세와 강자의 시선을 너무나 내면화한 나머지, 자타의 구별조차 사라졌다. 스스로 감시하며 강제하고 있다. 주권을 돌려받고(?) 공식적인 식민 지배는 끝났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식민주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가 그것이다. 


<YMCA 야구단>처럼 소박한 이야기로 한국 현대사를 통과하며, 성찰하는 영화는 흔치 않다. 거창한 소재로 시작하지만, 실상은 주장이 없는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스스로 탈식민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우리의 미래를 저당 잡힐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시선과 평가의 강박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다. 언어는 인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왔는가의 총체적 체계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사회는 외부의 이익에 휘둘리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민중의 것이 된다. p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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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사회에서 계급은 젠더화되고, 젠더는 계급화된다. 계급과 섹스는 맞물리는데, 성별에 따라 정확히 반비례한다. 권력을 가진 남자는 여러 여자와 섹스할 수 있지만, 권력이 없는 남자는 한 명도 차지하지 못해 한 여자를 여러 남자와 공유한다. 반대로,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한 남자와만 섹스하거나 무성애자고, '밑바닥 인생'일수록 여러 남자를 상대하게 된다. p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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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출세한 여자들은 출세한 남자들보다 더 남성적이냐(악독하냐)는 '이상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건 정말 이상한 질문이다. 조건 좋은 남성도 성공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여성이 출세하려면 자신이 주류보다 더 주류에 적합한 사람임을 증명해야 한다. "1980년대 영국에서 남자는 마거릿 대처 한 사람 뿐이다."는 유명한 말처럼 게임의 법칙을 만들고 운영하는 세력이 압도적으로 남성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성공은 남성성을 얼마나 잘 재현하느냐와 직결된다. 여성으로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리더십은 철저히 성별화된 가치였다. 리더가 되려는 여성들은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명예 남성'이 되거나 '어머니 리더'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최근 여성(운동)이 권력화되었다는 비판이 많은데,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런 식의 비판은 성별 권력 관계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힘이 없기 때문에 (남성) 권력화된다. 여성이 진짜 권력이 있다면, 반대로 권력이 여성화될 것이다. 과도기적 현상이겠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주류가 여성주의화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주류 가치를 확장하고, 강화하고,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 리더십의 등장이 곧바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여성주의 리더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 리더십과 여성주의 리더십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pp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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