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선생은 한 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유적과 유물을 이야기한다. 왕조사가 중심이 된 시대 구분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다분히 추상적이어서 사람들이 한 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리가 있는데 나 또한 학교에서 역사를 왕들의 이름과 업적을 죽 나열하는 식으로 배웠고 그런 식의 역사 공부는 가슴에 스며들만한 무언가를 내게 전달하지 못했다. 유홍준 선생 말처럼 한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품은 물론 민중의 생활 도구 등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필요할 것 같다.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는 너무 멀다 쳐도 조선 시대는 바로 가까운 시대인데도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조선이 어떤 나라였을까. 세종대왕의 업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각종 사화, 구한말의 세도정치와 국권침탈, 몇몇 유학자와 실학자, 강고했던 신분제도, 유교적 질서, 과거제도와 조선왕조실록 등이 조선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엘리트였던 선비 집단이 어느 정도의 혁신성을 가졌는지 혹은 구제불능일 정도로 고루했는지, 당시 민중들은 또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꼈는지 분명치 않다. 아니 적어도 나는 잘 모른다.
19세기말까지 이처럼 강고한 신분제가 유지된 사회가 다른 나라에는 없었기에 이는 조선 사회가 굉장이 억압적이고 봉건적인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느 서양 학자가 쓴 책 바에 따르면, 서구 사회에 비해 양반들의 집 담이 낮았는데, 이는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조선 사회가 안정되어 있고, 특히 치안이 안전한 사회였음을 말해주기도 한단다. 구한말 서양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조선은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거지가 없는 특이한 사회였다. 그리고 양반집 문을 두드리면 과객 누구나에게 밥 한끼를 내어주는 풍습도 있었다 한다.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쓰는 풍습도 다른 나라에 잘 없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사회를 이끌어간 선비 계층의 세계관도 내겐 확실하지 않다. 그들이 자기 감정이 담긴 솔직한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몇몇 예외는 있지만). 다만 '사대주의'는 일본이 조선을 비하하기 위해 강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공고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간송전시회에서 조선의 선비들의 그림을 보았는데, 대단치 않은 소 한 마리조차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못 그리고 중국 소의 뿔을 그려넣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이상적으로 보았지만 조선의 경우를 봤을 때 문약함을 피할 수 없지 싶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현실 감각이 부족했고 지나치게 나이브했다. 정약용 선생의 글에 일본의 문물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감을 지적한 대목이 있는데, 그러면서 정약용 선생은 순진하게도 일본이 학문과 문화가 발전했으므로 예전처럼 야만적으로 우리를 침략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보았다.
그런 조선에서 이도(세종)라는 천재가 '한글'을 만든 것은 기적적인 사건인데, 이후 조선이 한글을 어떻게 대접했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성격이 드러난다 하겠다. 자국 언어와 문자의 배척은 결국 조선 사회를 문화적 예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중국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면서 고대와 달리 다른 여러 나라와 독자적으로 교류하는 힘이 약해진 것도 그 사회의 체질이 약화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이미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만큼의 부와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조선은 그때까지는 그것을 막아낼 힘이 있는 나라였다. 그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서도 반성하지 않은 기득권층이 문제였다. 신분해방을 단행하여 민중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보상을 하고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결국 조선의 문제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외교하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것을 중국의 승인을 거치는 나라에 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 사회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지식이 없는 일반인의 소회여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건축학적으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는 종묘가 그 건축학적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내게 특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까닭은 조선에 대한 이러한 내 이미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종묘는 문화해설사와 함께 관람하게 되어 있다.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 태조 이성계가 궁궐 짓는 일보다 서둘렀다고 한다. 조선 왕실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라 할 만하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결국 이곳이 조선의 신전이구나 했다. 그 신은 역대 왕들, 결국 조상이다. 입구에서 정전까지 박석이 깔려 있는데 3개의 길로 나뉘어 있다. 가장 높은 길은 조상신이 다니는 길, 그 양편으로 왕이 가는 길과 세자가 가는 길이 있다. 종묘는 왕과 세자가 역대 조상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중간에 목욕재계하는 방도 따로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마지막에 종묘의 정전에 이르게 된다. 광해군과 연산군을 제외하고 25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다.
붉은 색의 정전 건물은 카메라로는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조선 건축에서 가장 길이가 긴 건물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품위가 있고 엄숙함이 있으며 명상적인 느낌을 주는 특별한 건물이다. 조선시대 건축 중에 가장 인상적인 건축임에는 틀림 없었다. 열주를 세운 그리스의 신전과는 느낌이 다르지만, 유교적인 단아함과 함께 종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장소이다. 조선의 왕들은 해마다 5월이면 이곳에서 조상께 제를 올렸다. 그들은 이곳에서 마음속으로 무엇을 기원했을까. 이 왕조의 무궁한 번성이었을까. 백성들의 안위였을까. 그들은 왜 중국을 그토록 섬겼을까. 자의식이 부족했던 걸까. 중국 문화의 힘에 경도되었던 것일까.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도에 대한 예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유교는 그 철학을 수용하는 것이 왜 중국에 대한 숭배와 같은 의미였을까.
종묘 바로 옆에는 창덕궁이 있다. 창덕궁을 처음 본 때는 90년대였다. 빠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우리 것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들렀던 곳이다. 화려한 조각의 대리석 건물을 내내 보다가 다시 만난 목조 건축, 나무에 입힌 단청의 색감, 수수한 기와의 빗깔, 낮은 담과 대문, 흙길은 내게 동양적인 미감을 전해주면서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인상 깊게 새겨준 장소였다.
개인적으로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 오랜만에 다시 들른 창덕궁은 왕의 궁궐이라기엔 조금 초라한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못 본 후원을 보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창덕궁의 매력은 단연 왕실 정원인 창덕궁 '후원'이었다. 창덕궁의 외전과 내전, 궐내각사와 동궁을 지나면 후원 가는 입구가 나온다. 창덕궁 후원의 이곳저곳으로 가는 길은 오르락 내리락 산길을 깎아 만든 것인데, 마치 산 속에 있는 듯 자연과 어우러진 것이 후원의 매력이었다. 경복궁은 숲을 끼고 있지 않으며 경복궁 뒤에 조망되는 북한산의 풍광이 매력이라면, 창덕궁은 왕실 정원인 후원을 끼고 있어 산책의 매력이 있었다.
후원에서는 정조가 만든 인공못 '부용지' 일대도 운치가 있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장소는 옥류천 일대의 작은 정자들이었다. 샘물이 졸졸 흘러가는 이곳에는 아주 작은 정자 몇 개가 귀엽게 앉아 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볏짚으로 지붕을 올린 초가인 '창의정'이다. 창의정 앞으로는 자그마한 논이 있다. 초가로 된 정자는 처음 보는데 농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장소라 한다. 다른 나라 궁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고 조선 왕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곳이어서 규모는 작지만 인상 깊었다.
마지막으로 창덕궁 본채에서 조금 떨어진 낙선재를 보았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사대부가의 건물로 헌종의 사랑채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 황실가족이 마지막으로 거주한 집이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이후 창덕궁이 정전으로 쓰였고 마지막 황손이 생을 마친 곳이니 조선 왕실의 후반부 역사를 시작하고 마감한 곳이 창덕궁이었다.
왕조의 역사는 저물고 그들이 살았던 집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매일 찾아든다. 종묘와 창덕궁, 이제는 주인 없는 그 집을 바라보며 왠지 쓸쓸한 느낌도 들었다. 단지 왕조가 몰락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의 세계를 지탱했던, 그들의 삶을 철저하게 지배했던 이념이 오늘에 와서 그 명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었다. 사단칠정 논쟁으로 조선 후기 성리학이 깊어졌다고 하지만, 그 철학적 논쟁이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힘이 되지 못했고, 지금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면도 전혀 없으므로 내겐 공허하게 느껴진다. 사대부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구한말 의병 투쟁이 오늘날 별다른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조선 사회를 지탱했던 것은 유교 이념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친 농경 문화에서 비롯된 공동체 문화(산업화 이후 지금은 사라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쪽인지 나는 그 기원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어쩐지 뿌리라고 할까, 자기 색깔을 잃은 느낌이었다.
**2018/6 여행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