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책 이야기/교육 관련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 우치다 타츠루 외 ㅡ 토론은 최악의 교육

by 릴라~ 2018. 10. 31.

 

 

##

 

우치다/ 프라이버시는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의 매너 문제지요. 여자가 집에 오면 모두 예컨대, '아, 잠깐 가게에 갔다 오겠습니다', 혹은 '아, 정원을 청소해야 하는데'라고 말하고(웃음) 자리를 피해 주죠. 그런 배려를 함으로써 프라이버시를 확보하고 싶은 쪽이 자력으로 획득하거나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미묘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는 마음 씀씀이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장지와 장지문의 문화에서 프라이버시가 성립할 수 없었겠지요. 

 

유럽의 벽돌로 만든 집 같으면 두꺼운 벽이 있어서 문을 닫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물리적인 조건이 프라이버시를 담보해 주지만 일본에는 그런 것이 없었죠. 그래서 종이 한 장으로도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는 것은 공공성에 대한 감도 높은 배려가 없으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었지요.

 

근대화의 과정에서 가장 송두리째 뽑혀 버린 것이 이 공공성에 대한 감각 아닐까요. 공공의 장이니 사적인 장이니 하는 것은 외형적인 조건으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미묘한 인간관계의 무늬를 감지해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이, 게다가 상대방가지도 '아, 지금은 공공적인 국면이 되었으니 탁 풀어지지 않는다'거나, '지금은 사적인 공간이니까 몸과 마음이 흐트러져도 괜찮다'라는 식의 분별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 당시에는 사회적 능력으로 요청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과 사를 구별한다는 것은 같은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어도 관계의 형태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자신의 사적인 감각을 계속 발산하면 안 되는 국면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제가 최근 유행하는 젊은이들 표현 가운데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기모이('기분이 나쁘다'라는 문장을 축약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피부 감각적으로 기분이 나쁜 것을 사회관계의 영역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pp56-57

 

##

 

우치다/ (...) 교육 문제의 근본에는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말하라', '개성적으로 표현해라'와 같은 '일의적이고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아이에게 강제하는 것은 거의 다 죄악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말이 막히는 아이에게 아무리 말이 막혀도 괜찮다, 선생님은 기다려 줄 테니까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이 훨씬 우선순위가 높은 교육 과제 아닐까요.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려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서 말이 막히는 아이에게 '부끄럼쟁이는 미덕이야'라고 말해 주는 것, 혹은 이도 저도 아닌 말을 해서 '이런 식으로는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다'고 곧장 앞에 한 말을 거두어들이는 경우, 이야기가 빙빙 겉돌기만 할 뿐 전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이럴 때야말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과정을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토론이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는 데 최악의 교육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이쪽부터 반은 논점에 찬성, 이쪽부터 반은 반대의 입장에서 발언해 주세요, 이따위 토론을 하면 아이들은 잘 만들어지고 정형화된 문구를 어딘가에서 빌려 올 수밖에 없게 되지요. 이것을 단지 큰 목소리로 시끄럽게 주장하면 상대는 잠자코 들어야 하고. 이렇게 시시하고 세속적인 지혜를 익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짓을 몇 백 시간씩 해도 자기 안에 있는 '아직까지 말이 되지 않은 생각'과 '윤곽이 잡히지 않는 감정의 편린'을 말로 표현하는 힘은 길러지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겁니다.

 

먼저 생각이 제대로 말로 나오지 않아서 빙빙 도는 아이에게는 '그래,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인정해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순처름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어느 시점에서는 그 끝없는 중얼거림을 단념하는 법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00% 순수하게 말과 생각이 딱 들어맞는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있을 리 없다는 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찾을 수 없다고, 이쯤에서 손을 털고 단념하는 것도 커뮤니케이션에서는 필요합니다. 

 

단념의 단점과 장점이 동거하고 있다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지점이지요. 발단부터 모순이죠. 자신의 생각을 적절하게 전달할 말을 만날 때까지 머뭇거려도 괜찮으니까 '말을 찾아보라'고 했던 격려와,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인간은 절대로 만날 수 없으니 어느 시점에서 단념하고 '잘라 말하라'는 충고를, 아이에게 한꺼번에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늘 부족하든지 아니면 지나치든지 둘 중 하나로, 자신의 생각을 과함도 부족함도 없이 말할 수 있는 상황이란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한계점에 도달할 즈음에야 그나마 자신의 생각에 근접한 말들을 차례차례 이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말을 통한 완전한 표현을 단념한 사람만이 풍부한 언어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표현한 말만을 선택하려고 하면 '열 받아', '귀찮아', '귀여워' 같은 정말로 빈곤한 말밖에 남지 않습니다. pp68-69

 

##

 

니코시/ 열 살 부터 열한 살이나 열두 살. 본격적으로 이성과 사귈 용기는 갖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동성애적 감정에 빠져서 매우 깊은 우정을 나누는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첨chum' 세대라고 하는데요. 첨이란 강아지들이 장난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사춘기 심리학에서는 이 시기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그 다음에 오는 진짜 사춘기를 맞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춘기가 아니라 전 사춘기가 아닐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

 

우치다/ 전 사춘기에는 동성애적 감성이 있는 건가요?

 

니코시/ 그런 경향이 강하지요. 하나의 발달 단계 이론으로 말하자면 그 이후에 이성과 사귀는 예행연습을 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성은 서로 간에 알기 힘든 법 아닙니까.

 

우치다/ 동성이라는 비교적 알기 쉬운 타자와 만나서 거기서 먼저 수업의 단계를 쌓는 거군요. 과연, 무엇이든지 수업이 필요하네요.

 

니코시/ 전 사춘기에 깊은 우정을 키우는 사회적인 층계참이 예전에는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제가 초등학교 3, 4학년 그리고 5, 6학년일 때 살던 집이 아케이드 상점가 앞이었는데요, 1960년대 중반 무렵은 상점가 전성시대로 밤 9시까지 사람들이 다녔어요. 거기서 모두가 떼를 지어 롤러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저도 학교에서 저녁 5시까지 죽 놀고, 그 뒤에도 친구와 사방치기를 하거나 떠들며 놀았습니다. (...)

 

우치다/ 그렇지요. 부모 자식 간의 문제라거나 성에 대한 문제, 늙어가는 문제, 죽음데 대한 문제 등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마지막에 커버해 주는 사람은 전 사춘기를 공유한 동성 친구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오죠. (...)

 

그런  관계의 가장 좋은 점은 애당초 내 안에 없었던 것이 마치 내 안에 있었던 것처럼 실로 기분 좋게 들어온다는 사실이지요. 자신을 풍부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에요.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억지로 자신을 열 필요도 없고, '맞아, 나도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말하면 그만이니까요. (웃음)

 

니코시/ 그렇습니다. 제가 이게 좀 보편적인가, 하고 느낀 것은 그 감정이에요.

 

우치다/ 저도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40년 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하고는 싸우거나 논쟁을 벌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처음 만난 그 친구하고는 싸우거나 논쟁을 벌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처음 만난 그, 전 사춘기의 단계에서 제 '동포'로 정해 버렸으니까요. 제 인격을 그 친구가 이중화시킨 거지요. 그것이 이후의 저를 얼마나 자유롭게 해 주었는지..... 전 사춘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나와 똑같이 닮은 동성을 발견해서 그 사람이 경험한 것은 나도 경험한 것으로 할 수 있지요. 뭐랄가,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자신이 풍부해지고 해방돼요. 그런데 이런 일은 교육 현장에서는 그다지 이러니저러니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니코시/ 그렇습니다.
우치다/ 자연 발생적으로 아이의 내면에서 나오는 거라서.
니코시/ 그렇기 때문에 역시.....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왔는데...... 터전이 중요해요. pp103-106


##


우치다/ 그렇지요. 그가 말하기로는 그들을 지금의 일본 중학교 제도 안에 가두어 놓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겁니다. 자신은 13세까지라면, 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지나 여드름은 났지만 아직 성기에 털이 나지 않은 아이들 정도라면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이후에는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은 가르치고, '나는 공부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은 학교를 떠나 달라고 부탁해도 되지 않겠냐고요.


지금 일본의 공립 중학교에서는 퇴학을 시킬 수 없지요. 교사가 '너는 수업을 들을 마음이 없어 보이니까 나가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업을 들을 마음이 없는 학생이 교실에 그대로 남아서 소동을 피우거나 물건을 부수어도 그저 방관하고 볼 수밖에 없지요.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확실히 이건 심각한 사태입니다. 본디 13세나 14세에 성인이 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습관이었는데요. 지금의 일본은 고등학교까지, 조금 더 가면 대학까지 사실상 의무 교육화가 된 셈이잖아요. 그런 곳에 18세까지 가게 한다는 것은 딱한 일이지요. 


니코시/ 저도 완전히 동감하는데요, 이렇게 되면 새로운 가치관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는 학문에 맞지 않는다, 학문에 맞지 않는다고 좋은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아이에게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있다, 학문에 맞지 않는 아이를 키우는 우리도 나름대로 괜찮은 부모다....... 이런 가치관 말이죠. 이렇게 되기는 참 힘든 일이겠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의무 교육은 13세까지, '털이 날 때까지'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 뒤에 학교 밖에서 이것저것 경험을 하고 난 뒤에 다시 '아무래도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돌아오면, 그런 아이들은 공부하려는 동기가 확실하니까 훨씬 효율적인 교육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고학'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제 자신이 '고학생'이었으니까요(웃음). 단, 고학에도 조건이 있어서 너무 괴로우면 공부가 안 되죠(웃음). 국공립 대학의 학비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댈 수 있을 만큼 싸고, 학생이라는 신분에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이랄까, 책무의 면제가 있으면 고학하는 학생이 꽤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학비가 너무 비싸서 일하면서 대학에 다니기가 힘들지요. 우리가 대학생이던 시절에는 국립대학의 등록금이 연간 1만 2천엔이었으니까요. 한 학기 수업료가 6천 엔, 입학금이 4천 엔, 1만 엔짜리 한 장으로 대학생이 될 수 있었어요. 아르바이트 시급이 3백 엔 정도 하던 시대였는데 그래도 하루에 3시간 일하면 한 달 분 수업료를 벌 수 있었고요. 고학이라고 해도 아주 편했지요(웃음). 그런 제도적인 뒷받침을 마련해 두고, 공부하고 싶은 아이는 언제라도 학교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회로만 담보해 놓는다면 의무 교육을 13세까지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pp179-181


 

 

sheshe.tistory.com/1139

 

완벽하지 않을 용기 | 우치다 타츠루 ㅡ 교사는 부모와 다른 말을 해주는 사람

우치다 타츠루의 신간이 나왔다. 일본 사회의 변화 과정이 우리와 닮은 꼴이기에, 그리고 그 변화를 관찰하는 안목, 그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하여 경험과 지성과 연륜에서 우러난, 다른 곳

sheshe.tistory.com

sheshe.tistory.com/671

 

하류지향 | 우치다 타츠루 ㅡ 배움은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배우려고도 일하려고도 하지 않는 일본의 니트 족(70만으로 추산한다고 한다)을 중심으로 그들을 양산하게 된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을 사회학적 측면에서 섬세하게 파헤친 책이다. 학업 거부,

sheshe.tistory.com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