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려고도 일하려고도 하지 않는 일본의 니트 족(70만으로 추산한다고 한다)을 중심으로 그들을 양산하게 된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을 사회학적 측면에서 섬세하게 파헤친 책이다. 학업 거부, 노동 거부, 이른바 '성장'을 거부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도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기에 저자의 논의가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이 컸다.
저자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원리가 모든 면에서 충돌하는 현상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국민의 일자리 창출이나 지역 사회에 대한 지원, 조국의 국익"에는 관심 없이 사적 이익 증대에만 골몰하는 글로벌 기업이 보살펴야 할 가난한 친족을 안고 있는 국민 국가의 기업보다 훨씬 이윤을 창출하기 쉬운 구조이다. 하지만 정부는 국가에 기여하지 않는 이들 기업들이 공장을 해외에 이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각종 혜택을 몰아주며 이는 전세계적인 추세이다.
5년 이상은 내다보지 못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수명 감각을 내면화한 아이들은 이전 세대와는 삶의 감각이 다르다. 아이들은 자기 생각에 당장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견딜 능력을 잃어버린다. 매우 이른 나이에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소비자는 왕이다)을 확립한 아이들은 노동 주체가 아니라 소비 주체로 자신을 뚜렷이 형성하여 배움의 현장에 들어간다. 그 결과 아이들은 배움에 있어서도 물건을 살 때처럼 나에게 어떤 즐거움과 이익이 있느냐는 감각에 따라 움직이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클레임을 건다. 자신의 현재의 안목이 보잘 것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불쾌한 것이면 일단 거부하고 보는 것이다. 또한 과다한 정보로 둘러싸인 세계를 살다보니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이 있어도 알고자 하지 않으며 인지적으로 '구멍 난 세계'를 편안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 저자가 강조하는 중요한 지점은 현대사회가 학력이 취직의 보증수표가 되지 못하는 '리스크 사회'라는 점이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노력과 성과가 꼭 일치하지 않다보니 아이들은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관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들이 보기에 힘들게 노력을 기울인 데 비해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미미하므로 아예 노력하지 않는 태도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원인들이 맞물려 수업 거부, 학력 저하 현상이 보편화된다.
문제는 리스크 사회라 하더라도 사회의 리스크를 모든 계층이 골고루 떠안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리스크 사회에서 생존 경쟁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이 사회가 노력에 반드시 보상이 따르지 않는 리스크 사회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거스르고 의연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노력과 성과의 상관관계를 더 이상 믿지 않는 리스크 사회에서 그래도 여전히 노력과 성과의 상관관계를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자원을 획득할 가능성이 더 높다. 반대로 미래의 전망이 어둡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은 리스크 사회의 실상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선택적으로 빈곤층으로 내려가게 된다. 정말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리스크 사회란 지금 여기가 리스크 사회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만이 리스크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고, 마치 리스크 사회가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은 묘하게도 리스크를 방지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92)
저자가 보기에 이 모든 문제들은 미국식 '교환 모델', 즉 비즈니스 모델에서 출발했다. 부모 또한 비즈니스 모델에 입각해서 자식을 '속성 재배'하려고 한다. 자식은 부모의 제품이며 이 제품에 하자가 있을 시에는 육아의 실패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미국식 생산 시스템에 대한 숭상을 멈춰야 할 때가 왔다고 이야기한다. 돈을 척도로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는 가장 심각한 의미에서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사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할 때 삶이 다시 생기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시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비즈니스는 무시간 모델이고 반응이 즉각적이이고 시장에서의 성패가 바로 나오지만, 육아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고 우리 삶은 그렇지 않다.
배움이란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과정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은 일단 보류하고, 아직은 이해가 안 되지만 주의 깊게 듣고 있으면 언젠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경의와 인내심을 갖고 메시지를 맞이해야" (172) 한다. 이는 마치 교향곡을 주의 깊게 듣는 것처럼 개개의 음들이 하나하나 맞물려 화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끝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내지르는 해독 불가능한 기호도 알아듣게 되는 순간이 온다. 소음을 노래로 바꾸는 것, 이 과정에는 언제나 '시간'이 개입된다.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약속 장소를 미리 정해서 만나는 일이 사라지고 있지만, 언제 어디에서 만나자 라고 약속을 정하는 일은 "시간 속의 지도에서 나의 위치의 변화"를 예견하는 고도의 감각을 필요로 한다. 키보드를 두드리면 주식거래가 이루어지는 비즈니스 모델이 무시간 모델, 익명성, 비신체성을 특징으로 한다면 희망은 그 반대편에, "내가 이 광대한 우주의 다른 곳도 아닌 여기에,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이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무언가 위대한 존재'의 뜻을 감지"(228)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러한 영적인 감각을 무시간 모델의 정반대, 즉 '최대 시간 모델'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장대한 시간 속에 내가 우연히 있다는 감각을 기초로 해서 마침내 나 이외의 누구도 내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이 장소, 이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는 감각, 다시 말해 나의 유일무이성에 대한 확신"(228)을 싹틔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르지만 저자는 인간의 생명력을 믿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생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이 언젠가는 '이런 건 싫어요'라고 비명을 질러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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