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의 신간이 나왔다. 일본 사회의 변화 과정이 우리와 닮은 꼴이기에, 그리고 그 변화를 관찰하는 안목, 그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하여 경험과 지성과 연륜에서 우러난, 다른 곳에서 결코 들을 수 없는 견해를 들려주기에, 이 작가의 책은 꼭 챙겨보게 된다. 이 책도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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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컨대, 양국의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학교교육을 시장원리에 기초해서 말하고 사고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합니다. '학교교육을 시장원리에 기초해서 말하고 사고한다'는 것은, 교육을 이야기할 때 시장이라든지 수요, 비용 대비 효과와 조직관리, 공정관리와 같은 공학적, 시장적인 용어를 반복해서 입에 담는다는 의미입니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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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인류학적 기능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공동체의 차세대 구성원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육사업은 '아이들의 살아가는 힘을 높일 수 있는가?,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같은 물음으로써 옳고 그름을 음미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외의 일은 학교교육에서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의 상대적인 우열을 가려 등급을 매기는 것은 교육에 있어서 우선적인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끼리 우열을 다투게 해서 등급을 매기고, 등급이 높은 아이들을 우대하거나 낮은 아이를 처벌하는 것이 아이들의 시민적성숙에 도움이 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경쟁과 등급 매기기가 아이들을 성숙시킨다는, 아이들의 살아가는 힘을 높인다는 과학적인 증명 사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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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현재의 학교에서는 '확실하게 결과가 나오는 곳'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정된 자원을 경사배분해야 한다는 '선택과 집중' 이론을 마치 과학적 진리인 양 떠받드는 듯합니다. 돈 벌기로 연결될 것 같은 영역에는 돈을 투자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죠. 앞으로 도움이 될 것 같은 아이들에게는 투자하고 싹수가 없어 보이는 아이들은 방치한다는 규칙이 교육현장을 지배합니다. 여기에는 '미래의 공동체를 담당할 차세대 젊은이들의 성숙을 지원한다'라는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제로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들을 경쟁시키고 정밀하게 등급을 매겨본들 그런 것으로 인해 아이들이 '현명하고 제대로 된 어른'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경쟁적 환경은 아이들의 성숙을 방해할 것입니다.
이 논리를 좀 알기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동학년 집단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힘을 높이는 것, 또 하나는 경쟁 상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양쪽 다 상대적인 우열 가리기가 목표인데, 경쟁 상대의 힘을 약하게 하는 편이 비용 대비 효과가 압도적으로 좋습니다. 경쟁 상대들을 가능한 한 무능하고 무력한 인간으로 만들면 되니까요. 무수히 많은 방식이 있습니다. 노력하는 사람의 다리를 잡아당기고, 성숙한 어른이 되려는 사람에게 '폼 재지 말라, 잘난 체하지 말라'라는 둥 듣기 싫어할 말을 굳이 하는 것, 개성적인 사람을 '이상하다'며 배제하고 박해하는 것, 좀더 심플하게는 그냥 요란하게 교실을 돌아다니는 것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항함으로써 교사의 존엄을 허물어뜨리는 것..... 모두 '경쟁 상대의 살아가는 힘 떨어뜨리기'를 목표로 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매일 급우들의 살아가는 힘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p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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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갈등 속에서 성장합니다. 부권제 사회에서는 아이의 진로에 대한 결정권을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부권제 사회에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내리던 지시가 항상 틀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는데 아버지는 법학부 진학 후 변호사가 되라고 강요하는 식이지요. 아이의 욕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쪽은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결정권만 지녔을 뿐 자녀의 마음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생기는 틈에서 아이는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대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육아 전략 사이에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거죠. 과거에 어머니의 육아 전략과 아버지의 육아 전략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런 육아 전략 간의 대립 사이에서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망설이고 갈등할 수 있었습니다. p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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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는 서로 다른 성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다양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육아 전략을 지닌 어른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육아,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일은 공동작업이고, 단일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 한 명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성숙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여러 어른이 서로 다른 말을 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가정에 부모 외에도 고모, 외삼촌 등 다양한 가족이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었는데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지금 아이들에겐 그런 기회가 사라져버렸죠.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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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교사가 하나의 교육 프로그램을 공유한다면 아이는 절대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학교 선생님의 역할이란 본래 어머니나 아버지와 전혀 다른 말을 아이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결코 똑같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똑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역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이게 완전히 역전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육아 전략이 똑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학교의 교사도 부모와 똑같은 교육방침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상황은 아이의 성장을 조직적으로 방해합니다. 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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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과 일본은 똑같이 자본주의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더이상의 경제 성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인구도 자원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집단, 공동체를 형성해서 서로서로 지원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숙이란 타자와 함께 사는 지혜입니다. 자신과 생각도 다르고 느끼는 방식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너는 나한테는 이런 사람으로 보이지만, 다른 면을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야." 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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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지금도 19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긴장관계를 유지하되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되고, 사이가 좋아서도 안 된다는 거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수준의 적대관계 속에서 상호 불신하는, 그런 상태에 계속 머물게 만드는 게 미국의 전략입니다. 이건 딱히 미국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분할 통치가 식민지 지배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동아시아에서 국가 간 문제가 생길 때마다 미국이 불려옵니다. 예를 들어 북한 문제에 관해서는 6개국이 협의한다면 반드시 미국이 불려옵니다. 한일관계나 중일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당사자 국가들끼리 해결하는 상황을 원치 않습니다.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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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사회든 계속 평상시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는 예상도 못한 형태로, 극적으로 반드시 변합니다. 가치관이 붕괴한다든지, 경제 시스템이 붕괴한다든지, 정치가 붕괴한다든지 하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이나 테러, 전염병 또는 외계인의 침략 등 어떤 종류의 일일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안정적인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제일 좋죠. 그래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파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게 학교교육이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부분 아닐까요? 지금의 사회가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을 전제로 사회적 지위, 수입, 명예를 높이는 법만을 교육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극적으로 변해도 무사히 살아남아 우리 사회를 재건할 능력부터 길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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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직감력 길러주기가 학교교육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수천, 수만 년 전 미개 부족의 아버지가 서너 살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무얼 가르쳤을까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겠죠. 사나운 야생 동물이 습격할 수도 있고, 급류라든지 낭떠러지라든지 이런저런 위험 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독초나 독충, 경계해야 하는 다른 부족 등 다양한 위험 요소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장 먼저 가르쳤을 겁니다. 예를 들어, 야생 동물이 침입할 위험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사자와 싸워서 이길 만한 완력을 키우도록 교육하시겠습니까? 재빨리 도망칠 수 있게 다릿심을 길러주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적지 않을까요? 제가 만약 그런 부족의 어른이라면 아이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아채는 능력부터 가르칠 것입니다. 이 길로 게속 가면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수상한 것이 갑자기 나타날 듯한 느낌이라든지, 생명에 위험이 다가오는 걸 알아채는 직감은 무엇보다 우선해서 배워야 할 인간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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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수업할 때 무슨 일이 있든 맨 뒤까지 반드시 전달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리는 말입니다. 바로 '뒤에 있는 사람 제 말 들립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맨 뒷사람이 안 들린다며 손을 흔듭니다. 말이 들리냐는 질문에 안 들린다고 대답하는 이 상황은 상당히 독특한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는 순간입니다. (...) 학생이 단편적인 정보를 꿰어 맞춰서 의미가 통하는 말로 이해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은 단편적으로밖에 안 들리지만, 이걸 이으면 이런 메시지가 될 거라며 추리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무언가를 배울 때 아이가 가져야 할 최고의 자세가 아닐까요?
그 뒤로도 여러모로 실험을 해봤습니다. 어떤 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고요. 두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하나는 수업 중에 '춥네요, 난방을 좀 올릴까요?'라는 말입니다. 이 때도 확 집중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칠판에 글씨를 적고 있는데 햇빛이 교실에 들어오는 상황에서 '눈부시니까 커튼 좀 쳐줄래요?'라고 말하면 아이들이 확 집중합니다. 이 상황들의 공통점을 아시겠습니까? 목소리는 청각입니다. 추위는 피부 감각이죠. 눈부심은 시각입니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촉각이든 후각이든 미각이 됐든 자신의 오감을 동원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학생들은 오픈 마인드가 됩니다. p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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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평상시의 교육과 비상시의 교육은 다르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세계 각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교육이 모두 평상시의 교육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장 우선할 것은 비상시의 교육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이들에게 서바이벌 기술을 가르치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한 본질적인 기술은 오픈 마인드입니다. 자신의 감수성과 지성을 전방위적으로 최대한 열어두는 몸과 마음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p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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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연입니다.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강도 없고 바다도 없고 나무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이런 콘크리트 건물에 갇혀 있을 때조차 자신의 신체라는 자연은 남아 있습니다. 제가 생가하기에 인간의 지성이 발동하는 순간은 자연과 대면할 때입니다. 물론 지성이 발동하는 조건이 있는데, 이를테면 아이들을 게임기 같은 것 없이 자연 속에 던져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까 멍하니 하늘의 구름이나 꽃이라든지 곤충 따위를 봅니다. 그러다 아이들 표정이 확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아이들이 자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표정이 확 바뀌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멍하니 구름을 보다가 '어?' 한다거나, 파도치는 바다를 보다가 '앗?', 벌레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음?' 하는 식으로 말이죠. 여기엔 전부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패턴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멍하니 바라보던 자연 속에 뭔가 법칙성이 있지 않을까, 패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파도를 보고 있다가 몇 번에 한 번 큰 파도가 온다는 걸 깨닫는 식으로요. 이런 법칙성 같은 것을 느꼈을 때 아이들은 자기 머릿속에서 '이런 법칙이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가설을 세우고 그걸 실험으로 검증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이들의 지성이 최대화됩니다. 진력을 다해 자연을 관찰합니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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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아이디어는 아주 자그마한, 어렴풋한 느낌에서 시작합니다. 길을 걷는데 건너편에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멀리서 나타나 스쳐나가는 사람을 쫓아가서 모퉁이를 도는 순간, 꼬리를 잡는 듯한 느낌입니다. 뭔가를 만든다는 것, 상상한다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순간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느낌입니다.
아마 여기도 연구에 계속 몰두해본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아시리라 생각하는데, 장기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같은 연구를 하다 보면 '아카데믹 하이'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런 건 틀에 박힌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내면, 뇌나 신체 내부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에 계속 집중하지 않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생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자기는 여기 있고 타인이 옆에 있어서 그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맺으면 좋을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생각하실 겁니다. 전 공생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생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또는 인간과 신체의 관계입니다. 틀에 박힌 삶을 유지하면서, 똑같은 일상을 매일 반복하면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변화들을 놓치지 않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태어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자기 내면에 미지의 것이 있다는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디어라는 건 결국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퉁이에서 간신히 붙잡은 꼬리를 당기다 보면 거대한 무언가가 딸려 나옵니다. 전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p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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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름대로 자기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그 중학생 아이가 생각하는 '자기답게'와는 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자아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집합주택, 아파트 같은 것입니다. 지저분한 목조 건물에 사람들이 있고, 가운데 복도가 있어서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는 거죠. 아주 조용한 사람도 있고, 시끄러운 사람도 있고, 깨끗한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더럽히는 사람도 있고, 제멋대로인 사람도 있고, 야비한 사람도 있고, 의외로 품위 있는 사람도 있고, 손이 큰 사람도 있고, 구두쇠도 있을 거고요. 그 많은 사람이 제 안에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나름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중재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집주인은 아니고, 그냥 주민 중 한 명이지만 '모처럼 한곳에 살게 됐으니 사이좋게 지내요'라고 말해주는 거죠. 때때로 깨끗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매번 집을 더럽히는 사람을 내보내야 된다, 쫓아내자고 하면 조정역이 가서 달래는 식으로요.
자아에 대해 제가 가진 이미지는 그런 아파트입니다. 이 아파트는 주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커집니다. 규모도 커지고 생활이 풍부해집니다. 주민들이 점점 다양화되니까요. 이 아파트 전체가 하나로서 기능하니까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문제는 302호에 사는 사람한테 물어봐야 한다, 저 사람이 적임자다'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있겠죠. 이런저런 사람이 있을 거예요. 돈을 많이 버는 사람, 토론 잘하는 사람, 남을 잘 속이는 사람 등 여러 유형의, 다양한 특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거죠. 거기서 '나'는 여기 살고 있는 한 명의 주민이 아닌 아파트 전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제 자아 안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언뜻 '나답다'라는 것은, 하나의 사고방식과 단일한 가치관 및 미의식을 가지고 하는 일마다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지만, 저는 수미일관성과 자기다움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오리지널리티, 자기다움이란 것은 이런 아파트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 아파트의 풍경, 촉감, 냄새, 기능 등 그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1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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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애석하게도 현대 사회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공생의 매너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아이들의 자기다움, 오리지널리티 등에 이상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공생의 매너를 배울 기회를 잃고 어른들은 그걸 가르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것이 이 시대에 일어나는 커다란 불행들의 원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병들어갈 때 특유의 정신 상태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프라이드를 내세우고, 내가 가져야 할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보입니다. 사회 전체가 정신병자를 만들고 있는 건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집착이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입니다. 지금의 사회는 옷, 음식, 수집품 등에 대한 집착을 상당히 높게 평가합니다. 아마 사회적 요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무언가에 집착할수록 소비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이죠.
자신의 경제 상황과는 상관없이 그게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물건을 삽니다. 남드로가 다르게 입으면 주위에서 바보 취급당한다고 생각하고, 사회적 능력이나 학력, 사는 집과 자동차, 라이프스타일 등에 자기 프라이드가 걸렸다고 여기니까요. 이런 집착은 자기 고유성을 점점 축소시킵니다. 다양한 사람이 사는 목조 주택이 아니라, 단 한 명이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하는 집에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p1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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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신의 자아, '나다움'을 어떻게 설계할지 정할 때,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처럼 어린아이들부터 중학생, 고등학생까지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역시 '자기 내면에 다양한 것이 혼재해도 괜찮다'라는 생각일 겁니다. 어느 아이에게도 품위 있는 면과 비루한 면모가 있고, 용감한 면과 비열한 면이 있으며, 향상심 있는 부분과 방종한 부분이 있고, 선량한 면과 사악한 면이 있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런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개성이란 것이 항상 수미일관적으로, 똑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려줘야 합니다.
자아의 깊이라거나 넓이, 풍부함이야말로 개성이라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 나는 이런 스타일의 옷밖에 입지 않는다거나 이런 음악밖에 듣지 않는다는 사람은 스스로를 개성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대량 생산된 상품을 그저 소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자신의 내면에 풍부한 개성의 단편을 지닌 아이들이야말로 이윽고 성숙한 시민이 되어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찾아오는, 다른 사회에서 방문하는 타자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을 갖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p1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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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본이 가난하던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봐왔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각자 개성이 있었고, 집이 가난하니까 음울하다거나 위축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950년대의 아이들, 청년들 중에는 자신의 정확한 사회적 위치라든지 요구할 수 있는 지위, 가져도 될 야심, 기대할 수 있는 수입에 대해 빨리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그때보다 훨씬 윤택합니다. 그런데도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 훨씬 좁은 가능성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라가 쇠퇴하고 경제력이 약해진다고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21세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감소하거나 경제 성장이 멈춰 정체되는 상황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은 예상했습니다만, 실제로 일어난 사회 변화는 제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해 객관적이고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모두 똑같은 일을 하는 사회가 출현한 것입니다.
결국 일본의 문제는 인구 감소라든지 경제성장의 침체와 같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국력을 다시 높일지를 고민하는 방향이 아닌 등급 매기기와 차별, 균일화의 길로 달렸다는 점에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인구 감소 문제에서든 성장의 정체에 있어서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태라고 생각합니.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으니 말이죠. 당연히 경제 성장도 더이상은 없습니다. 몇 년 후면 한구이나 중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면 아마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공평하게 분배하느냐를 놓고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하자'는 주장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식별 지표로 영어 회화 능력에 의한 차별화를 채택할 것입니다. p17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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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공교육의 수혜자는 사회 전체입니다. 교육사업의 주체는 교사'들'이며 수혜자는 집단 전체입니다. 교사 혼자서 수업하는 것이 아니며, 교육의 성과를 개인이 독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수의 사람들이 가르치고, 복수의 사람들이 혜택을 입어, 그 혜택을 다시 복수의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 교육이라는 것은 이렇게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영위라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학교교육이, 아마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이처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유 중 하나는 학교교육의 목표가 아이들을 능력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으로 나누기 위한 선별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교단에 선 교사가 아이들에게 주는 것은 일종의 선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물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답례하고 싶다는 부채감을 느낍니다. 답례하지 않고 혼자만 누리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 '누군가에게 돌려주자' 생각합니다. 자기가 받은 교육이 있고, 그로부터 얻은 지식과 기능이 있다면 어떻게 남을 도울지 생각할 터입니다. 증여가 일어나는 거죠. 교육이라는 것은 이렇게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받은 쪽은 지식이나 기능이라는 선물을 다음 장소로, 감사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장소로 가져가 발휘합니다. 이런 순환 속에서만 교육사업이 성립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팀을 형성해서 교육하고 있다는 사실, 이 팀에는 옆에 있는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교사들도 포함된다는 넓은 공생감을 갖고 교육을 행하셨으면 한다는 점입니다. 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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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일본에서도 학교교육으로의 시장원리 침입, 나아가 학교라는 조직 자체를 주식회사 구조로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이 요 10년간 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결과적으로 학교라는 존재가 조직의 관리, 학생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규격화하는가를 우선시하며 규격화한 아이들에게 등급을 매기고 우수한 아이들에게는 포상을, 뒤떨어지는 아이들에게는 벌을 준다는 심플한 구조가 정착돼버렸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건 아이들에게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을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것'만 요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래 아이들은 저마다 다양한 재능, 소질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 다양한 재능이 하나하나 개화하도록 지원한다는 발상 자체가 현재 일본의 학교교육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교육계가 아이들을 규격화, 균일화하고 등급 매기는 일에 모든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p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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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어른을 찾습니다'입니다. 어른을 찾으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합니다. 살아남고 싶고 기왕이면 잘살고 싶은 본능은 자신의 내면에 있습니다. 그런 본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어른을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이론이나 이데올로기, 신념 등과는 다릅니다. 여러 갈래 길 중에서 어느 길로 가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실제로 이 세상엔 있습니다. 그런 직감을 활용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누구를 따라가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는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도망치는데 몇몇 사람이 나서서 '이쪽으로 도망치자'고 할 때,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살아남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죽을 겁니다. 이런 능력 정도는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어른의 능력은 외부에서 등급을 매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물로서의 직감을 믿는 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p31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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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설계적 특성상, 역사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특정 세대가 혜택을 독점하고 어떤 세대는 배제되는 게 당연합니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수혜를 받은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증여하는 것, 이보다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연장자에게는 젊은이를 지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도, 학술적으로 도울 수도 있습니다. 힘과 재력을 가진 연장자에게는 어떤 방법으로든 젊은이들의 사회적 진출과 성장을 지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원의 재분배란 국가나 지자체의 의무임과 동시에 개인이 할 일이기도 합니다. 단, 한 명의 개인이 재분배할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될 수밖에 없으므로 모든 연장자가 주변의 젊은이를 지원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시민의 의무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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