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 대해 논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영상 매체가 점점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이 유튜브 시대에 문해력, 즉 리터러시의 본질을 묻고 있다. 우리가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텍스트를 읽는 힘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평소 내가 늘 고민하던 주제라서 재미있게 읽었다.
우리가 책을 읽고 세계를 읽고 맥락을 읽는 것은 결국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에게 다가가는 과정이다. 글에 대한 표면적, 단선적 이해로는 거기에 이를 수 없으며 깊이, 흠뻑 빠져들어 읽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진실한 이해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타인을 아는 만큼 자신을 알며 자신을 아는 만큼 타인을 이해할 수 있기에. 그래서 읽기는 처음엔 저자와 그가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귀결된다. 읽기는 한 개인의 내면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동시에 우리가 타인을, 그리고 당대를 넘어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윤리적 물음을 그 안에 담고 있다.
문제는 평가가 교육과정을 압도하는 지금의 학교 틀로는 이렇게 읽기 어렵다는 점이다. 읽기는 독자가 텍스트를 자유롭게 여행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을 발견하며 정신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시험 또는 스펙을 위한 읽기, 평가의 공정성 때문에 다양한 질문과 해석 대신에 정답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읽기에서는 타자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거나 자신의 깊이를 한껏 들여다보는 데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 마치 배낭여행 뒤에 시험을 친다고 하면 여행지에 대한 자유로운 탐색 대신에 시험에 나올 것만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 읽기의 기쁨은 실종되고 읽기를 통한 발견의 기쁨 또한 사라진다.
저자들은 '좋은 삶'을 위한 읽기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타자의 세계에 빠져드는 읽기, 얄팍한 물음이 아니라 두꺼운 질문을 낳는 깊이 있는 읽기, 삶을 억압하는 읽기가 아니라 삶의 기쁨을 창조하는 읽기, 민주사회와 같은 거시적 담론 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도 천착하는 읽기, 절대적 진리와 옮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다양한 의견의 집합체임을 인식하는 읽기, 많은 양을 훑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 읽기를 통한 깨달음에 주목하는 읽기이다. 이것은 읽기 교육의 목적과 동일하며, 국어교육이 전반적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지금 국어 교과서는 자잘한 성취기준을 맞추느라 매우 산만하게 조직되어 있어, 학생들이 한 주제에 몰입하기도 쉽지 않고, 두꺼운 질문을 낳는, 마음 속에 삶에 대한 커다란 반향을 남기는 훌륭한 텍스트를 마주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교과서 글을 70퍼센트 정도 활용하고 좋은 텍스트를 추가하여 교육과정을 주제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내용 면에서 서로 연관성이 없는 글을 성취기준 중심으로 묶어놓은 교과서보다는 주제 중심으로 몇 편의 글을 함께 공부하면 조금 더 호흡이 긴 수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질적인 읽기, 세계를 깊이 읽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해진다.
이 책을 읽으며 교과서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읽기 과정도 더 자유로운 여행으로 구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텍스트 자체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읽고나서 두꺼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다 소화하기가 벅찰 때가 있다. 텍스트를 읽는 과정이 새로운 발견과 인식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향유하는 과정이 되도록 잘 설계해야겠다. 읽기의 기쁨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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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저는 텍스트라는 매체, 읽기라는 행위가 '개인을 출현시켰다'고 생각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구분해주신 것처럼, 구술문화에서는 지식 자체가 공동체지식이죠. 여기서는 지식의 주체가 공동체예요. 부족장이나 어른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개별화된 지식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어요. 절기에 맞춰 마을 단위에서 이뤄지는 전통 의례 행위 같은 것도 조금씩 변하잖아요. 이런 연행 행위도 마을 어른들의 지도 아래 다른 사람들이 협업하면서 살아 움직입니다. 다들 조금씩 보태가면서 공동 창작의 형태로 발전시킨 지식입니다.
근대가 개인을 전면화시켰지만, 그 이전이라고 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 특히 불교의 승려들은 다 개인이었어요. 이들이 개인일 수 있는 이유가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데, 읽는 순간에 인간은 고독해지거든요. 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고독한 작업이죠. 구술문화에서 듣는 것은 계속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예요. 이와 달리, 읽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여행을 떠나는 거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책을 읽었던 이유가 그거였어요. 단칸셋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지만, 책을 읽을 때만은 내가 그 방 소속이 아니게 되거든요. 많은 사람이 읽기를 여행에 비유하는데, 저는 비융가 아니라 실제적 행위라고 생각해요.
여행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나서 낯선 곳으로 혈혈단신 가는 것이죠. 개인이 된다는 것에서 고독은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고독해진다는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로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자기를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자기를 대면해야만 내면이 탄생합니다. 내면이 형성되는 계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읽는 행위에서 비롯되죠.
읽기가 어떤 역량을 키워주는가라는 주제와 결합시켜본다면, 저는 읽기라는 행위가 두 가지 역량, 고독해질 수 있는 역량과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고 생각해요. 아렌트가 구분한 개념으로 보면, 읽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고독해지는 게 아니라 외로워집니다. 추방되는 것에 가까운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와요.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역량인데, 바로 이것이 읽기와 관련해서 더 깊이 얘기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해요. 읽기는 개인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성장시키는가.
다음으로 문자와 읽기가 키워주는 역량이 무엇이냐, 저는 역사에 대한 감각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사유한다는 게 중요해요. 역사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고 흐름에 사건들을 엮을 줄 안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볼 때 자동으로 역사적으로 사유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문제 같은 현안이 생길 때, 가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 이 일이 벌어지는가, 또 과거에는 이 일을 어떻게 다루었기에 여전히 그 여파가 지금에 미치는가,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시긍로 사유한다는 거죠. 이게 역사적 사유예요.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의 특징은, 현재를 똑 떨어진 시공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텍스트성이 생기고서야 기록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긴 역사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자기 자신을 연속선상에 놓고 사유할 수 있게 되거든요. 짧은 역사를 갖고는 역사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짧은 역사에 대해 우리가 쓰는 개념은 '당대'예요. 3대라고 해도 사실 당대죠. 당대를 넘어서야 역사적 감각이 생겨요. p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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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텍스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책을 꼭 끝까지 읽어야 된다거나 완벽하게 읽어야 한다고 고집하지는 않아요. 책의 서문만 볼 수도 있고, 목차 중에서 흥미로운 장만 골라서 읽을 수도 있어요. 학습서라면 색인을 펼쳐서 흥미로운 키워드를 뽑아서 볼 수도 있죠. 자신의 공부 방향에 따라 특벙한 주제, 흐름을 가지고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쌓고, 생각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일종의 담론 공간을 만들어내죠. 거대한 지식의 세계에 작지만 자기 생각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짓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학생은 아직까지 그런 역량이 부족해요.
그걸 키워주려면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문제의 재료로 대하게 해서는 안 되죠. 무조건 암기하거나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서 답을 맞혀야 되는 세계, 텍스트가 평가에 압도당하는 세계가 아니라, 재미를 추구하면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나아가 새로운 의미를 디자인할 수 있는 재료이자 영감으로서 텍스트를 경험해봐야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경험을 과연 학교 수업시간에, 특히 국어, 영어, 과학, 사회 시간에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요. 의미 있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지만, 학교 교육 전반이라는 틀에서 보면 학생들은 아직까지 텍스트의 세계가 갑갑하고 자신을 속박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요. 텍스트와 평가의 분리가 불가능한 상황인데, 기본적으로 평가가 리터러시를 성장시키기보다는 주어진 틀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유튜브에 가면 그게 사라지는 거예요. 영상의 바다를 끝도 없이 항해할 수 있는 거죠.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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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리터러시는 개인적인 역량이 아니라 사회적인 역량이에요. 그런데 이 리터러시의 역량을 개인화해버릴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양극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영상과 달리 텍스트는 추상성의 문제 때문에 진입 장벽이 더더욱 높아서 양극화를 피할 수가 없죠. 결국은 책 읽는 인간과 책 안 읽는 인간, 이렇게 나뉘는 거예요.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문화자본이 계급적으로 분배되는 거죠.
리터러시 역량의 개인화에 대해 제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소위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는 거예요. 지금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혐오, 그게 여성 혐오든 노인 혐오든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든, 그 바탕에는 리터리시 문제가 깔려 있거든요. 만날 하는 말이 "노인네들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어라, 신문 좀 읽어라."인 이유 또한 그들의 지적 능력에 대한 비하를 통해서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죠. 그 뿌리에 리터러시의 개인화가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터러시가 개인적 역량이지만 그 역량을 키우는 것은 사회적 역량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사회적 역량이 되었을 때만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는 혐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어요.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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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리터러시를 논의할 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느냐 영상을 봐도 되느냐가 아닙니다. 그 무엇을 하든, 이것들을 통해서 타자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죠.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타자의 세계가 나의 세계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죠. 그러지 않고 너무나 쉽게 타자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알고 있다고 생가가고요. 이건 너무나 무례한 태도예요.
저는 이런 경향이 반지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반지성주의의 핵심이 '공부가 쓸모없다고 생각해 무시한다'가 아니라 '발견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봅니다. 인터넷 댓글에서 쓰는 '동감합니다, 동의합니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걸 발견해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걸 확인하는 행위만 있는거죠. 책을 읽을 때는, 책 산 돈이 아까워서라도 내 생각과 같은 걸 확인했다고 해서 읽기를 멈추지는 않거든요. 끝까지 읽으면서 새로운 걸 발견한다든가 내 생각과 다른 게 뭐지 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되죠. 그에 비해 인터넷 안에서 기사나 댓글을 읽을 때는 내 생각과 같은 것만 찾아내요. 그걸 통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규모를 발견하는 거죠. 내가 사실은 외로운 존재도 아니고, 이 정도의 세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거예요. p17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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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씀하신 것이 결국, 사람이 어떻게 윤리적 주체가 되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리터러시가 글자와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을 읽는 게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게 바로 윤리가 발생하는, 그리고 윤리적 주체가 되어가는 지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혹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리터러시가 생기고, 또 어떤 다리를 놓을 것인가라는 관계 맺음의 코드를 알 수 있게 되니까요.
윤리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얄팍한 이해가 아니라 깊이 있는 이해요. <다시, 책으로> 등에서는 깊이 있게 읽는 것이 그 사람이 되어보는, 그 상황에 내가 들어가보는 경험을 제공해준다고 강조해요. 영화를 통해서든 책을 통해서든, 긴 글이든 아니면 짧은 글이라 해도 시처럼 압축적인 글, 추상성이 높거나 메타포가 압축적인 글을 이해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상황에 들어가보는 것이거든요. 깊이 들어가는 거고, 흠뻑 젖는 것이죠. 이게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깊이 들어가고 흠뻑 젖어봐야 다양한 상황, 또 모순적인 상황에서 입체적으로 그 사람의 입장과 모순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전히 대하소설과 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걸 읽고 향유할 힘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처지와 입장에 역지사지하고 감정이 입히는 것이 입체적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한 단면만 보고 어떤 상황에서만 '저 사람 불쌍해', '저 사람이 맞아', '쟤가 틀렸네', 이런 판단을 한다는 거죠.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터넷 댓글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상황이 바뀔 때마다 감정이 휙휙 바뀌어요. 처음에는 "이 사람이 나쁜 놈이네. 죽어버려!" 그랬다가 조금 다른 증거나 정황이 나타나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네가 죽어라." 이렇게 되는 거죠.
삶을 위한 리터리시란 인간의 삶이 어떤 국면에서 얼마나 입체적이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끊임없이 장면이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임꺽정>을 읽을 때 처음에는 이런 편견을 갖고 있단 말이에요, 임꺽정은 의적일 거야, 하지만 읽다 보면 임꺽정이 그냥 도둑이거든요. 그럼 계속 판단을 갱신해야 돼요. 이 도둑을 지지해야 되나? 이 도둑질을 옳다고 생각해야 되나? 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그 시대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거예요. 임꺽정이라는 사람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거죠. 임꺽정이 도둑질을 할 때나 가족에게 이상한 짓을 할 때, 허세를 부릴 때, 더 이상 이 사람이 의적이다 아니다라는 잣대로 판단하지 않게 돼요.
리터러시 교육이 삶에 대한 이해를 지향해야 한다고 할 때, 그냥 듣기 좋으라고 말하는 삶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삶이라는 게 얼마나 복합적이고 입체적인가에 대한 이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국면이 바뀔 때마다 그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황이 바뀐다 하더라도 그때 그 사람이 그러는 이유에 대한 이해, 거기에 도달하게 해주는 게 리터러시여야 하는 거죠. p18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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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험은 왜 호흡이 길 수가 없는가? 교사들도 그렇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강사나 교수들이 모두 고민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호흡이 길수록 평가자의 공정성, 아니 공공성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평가자의 공정성이라는 잣대는 평가자의 개인 역량에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 평가자의 공공성에 대한 신뢰는 제도적 신뢰입니다. 평가를 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그 제도에 의해 위임받는 사람이라면 공공적 기준을 가지고 평가할 것이라고 믿는 거예요. 제도의 공공성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평가자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가 없죠. 아쉽게도 우리는 평가자를 보증하는 제도에 대한 신뢰가 없어요. 그 사람이 공공적 기준을 가지고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겠어요. 이런 점에서 보면, 관건은 공정성을 넘어서는 공공성에 대한 신뢰입니다. 평가자의 공공성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공정한 평가가 가능한 방식으로 문제가 출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래서는 단답형과 선다형 문제를 넘어서는 방식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정답이 확실한 단편적인 지식을 묻는 문제 위주로 출제해야 한다는 압력이 크게 있고, 그걸 공정성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니 이걸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거죠. 이게 참 답 없는 문제예요. 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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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제안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사람과 이야기를 해서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거예요. 구술사 프로젝트가 됐든 문화기술지 프로젝트가 됐든,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공부를 안 했으면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을 텐데, 어쨌든 질적 연구를 하다 보니 관찰을 하고 인터뷰를 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저랑 생각이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저랑 생각이 똑같은 사람이랑 얘기를 하면 논문의 의미가 없으니까요. 질적 연구나 구술사 프로젝트를 하듯이, 자신과 생각의 결이 많이 다른 사람과 인터뷰를 해서 그걸 정리해보고, 이 사람이 왜 그런 용어를 써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해보는 거죠. 인류학적 조사방법론이 리터러시 교육에 주는 시사점이 있어요. 내가 그동안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을 찾아가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무엇보다 기록해보는 것, 기록해서 성찰적으로 글로 풀어내보는 작업,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꼭 오지에 가서 할 필요는 없거든요. 동네 치킨집 사장님일 수도 있고 반 친구나 가족일 수도 있죠. 솔직히 함께 사는 가족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많잖아요. p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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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로 영어 논문이라는 장르를 가르쳐요. 사실 논문은 구조나 내용의 복잡도가 상당히 높은 장르죠. 그래서 처음부터 논문을 분석하기보다는 쉬운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논문의 구조로 가는 디딤돌을 만들어요. 그래서 택한 것이 요리법입니다.
요리법을 보면 우선 요리 이름이 있죠. 다음으로 음식 사진이 나오고요. 다음에 단계별 요리 과정이 제시되죠. 약간의 주의사항 같은 걸 더할 수도 있고요. 학생들과 먼저 레시피를 왜 쓰는가를 이야기해요. 장르의 존재 이류를 다각도에서 살피는 거죠. 그리고 레시피라는 텍스트 장르가 왜 하필 요리 이름, 사진, 재료, 요리법의 정보를 갖고 있는가 이야기합니다. 정보 구조를 파악하는 단계죠. 다음에 요리법에 사용되는 전형적인 어휘적.문법적인 형태를 살펴봅니다. 예를 들면 재료를 영어로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건 당연히 재료 이름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재료가 어떤식으로 손질되어 있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말린' '다진'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거죠. (...) 다음엔 계량인데요. 예를 들면 몇 개, 몇 스푼, 몇 쪽 같은 게 나와요. 부피나 무게를 나타내는 표현도 등장하고요. 그러니까 요리 이름이 나오고 요리 사진에 걸맞은 '이미지의 문법'을 따라 찍힌 사진이 나오고 다음에 재료가 나오는데, 재료를 나타내는 말은 일정한 어휘. 문법적인 패턴을 따르는 거죠. 양을 나타내는 표현, 준비 상태를 나타내는 과거분사, 그리고 재료 이름이 나오는 거예요. 다음에 단계별 요리법이 나올 때는 명령문의 형태를 따릅니다. '무엇을 몇 분간 끓여라'라고 말하려면 boil로 시작하는 명령문이 나오고, 재료 이름이 나오고, 다음엔 시간, 즉 '몇 분간 해라, 언제까지 해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
학생들은 요리법 분석 결과를 논문의 구조에 대한 이해로 확장시킵니다. 단순한 글이지만, 분석을 해보면 특정한 장르의 텍스트가 왜 그런 정보 구조로 되어 있고, 정보들이 어떤 순서로 배열되고, 이에 따른 언어의 특징은 어떠한지 알 수 있거든요. 레시피를 쓰는 일이든, 논문을 쓰는 일이든 일종의 사회적 관행인데, 이게 텍스트화되는 과정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차이가 있다면 요리법은 매우 단순한 구조와 내용으로 이루어지지만 논문은 보다 위계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죠. (...)
학생들에게 글쓰기가 단지 틀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한 가지 과제를 더 줍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활동'이라는 돤점에서 볼 수 있는 과제죠. "여러분은 영어로 요리법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일제 여러분 인생의 주제를 가지고 레시피를 써보십시오. 일면 'Life Recipe'입니다. 언어적인 특징은 요리법 쓰기에서 가져오되, 레시피의 주제, 즉 '~하는 법'은 여러분 각자의 인생 경험에서 가져와서 쓰는 겁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하루를 온전하게 망치는 법', '순식간에 폐인 되는 법', '오랜 연인과 헤어지는 법' 같은 걸 쓰는 거죠. 기억에 남는 건 한 학생이 쓴 '만원 지하철에서 앉는 법'이라는 글이에요. 준비물은 '굉장히 핼쓱해보이는 인상, 엄청나게 무거워보이는 가방, 핏기 없는 얼굴, 노메이크업, 무릎 보호대' 같은 것들이에요. 이 학생은 매일매일 1호선을 타고 힘들게 학교에 오는데, 거기서 앉으려면 어떤 준비물이 필요한가를 쓰고, 실제로 지하철에서 어떤 퍼포먼스가 필요한가를 썼죠. 고된 일상에 맛깔난 유머를 섞은 글이었는데, 읽으면서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들이 이 글쓰기 과제를 재밌어한 이유는, 기존의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방법을 배우고 나서 그걸 자기 삶의 영역으로 가지고 왔기 때문이에요.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썼지만 즐기면서, 재밌게 쓴 거죠. '알바 사장님께 자기 주장을 펼치는 법', '10년 안에 아파트 세 채를 장만하는 법', 이런 걸 쓴 친구도 있었어요. 자기 삶에 스며드는 글을 쓸 때 느껴지는 뭉클함이 있거든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존재의 고양'을 느끼기도 하고요.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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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터러시 교육에서는 그런 짧은 호흡, 내가 당장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은 시간의 개념을 바꿔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긴 글이라는 게 단순히 길이기 길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읽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고 자신을 돌아보며 심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긴 글이에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측면이 드러날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의 반전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런 건 긴 글을 끝까지 읽어야 경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소셜미디어에서는 당장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돼요.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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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라는 리터러시의 측면에서 본다면, 세계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의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말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사람의 의견이고 그 의견은 내 의견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극을 준다는 점을 성찰해낼 수 있거든요. 리터러시 교육이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양한 말을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하고, 그 말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줄 알아야 하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하나의 '의견'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인 진리나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의견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너무 빨리 판단하기 전에요.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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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터러시의 위기라는 것이 기쁨의 위기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걱정하지 않습니까. 또 책을 안 읽어서 책도 많이 안 팔린다고 걱정하고,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그동안 책 읽기나 글쓰기를 가르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죠. 그런데 교육의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읽고 쓰는 행위 자체가 삶에서 기쁨을 줄 수 있는 행위인가가 중요해요. 스펙 혹은 상품성으로 평가되는 독서나 글쓰기는 기쁨과 거리가 있습니다. (...)
리터러시의 위기라는 게 있다면, 텍스트 자체의 질이나 양의 문제는 아닐 거고, 그걸 둘러싼 삶의 기쁨의 위기인 거 같아요. 리터러시가 기쁨으로 다가갈 수 있느냐, 그런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죠. (...)
학생들에게, 특히 젊은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거나 글을 쓰게 하려면 지금 교육과정뿐 아니라 삶의 질서를 바꿔야 돼요.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 이게 너무 빡빡하게 돼 있잖아요. 그러지 않아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독서나 글쓰기를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하면 즐거울 리가 없죠. p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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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요새 문해력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독서다' 하면서 나타나는 패턴도 있고, 또 독서토론 모임들 안에서도 잘하는 데가 많고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기 같은 걸 보면 두껍게 읽어내지 못하는 게 보여요. 독서토론의 핵심은 두껍게 읽어낼 수 있는 역량을 키워가는 과정이에요. 그럼에도 두껍게 읽고 깊게 읽어내는 게 아닌 경우가 많은 거죠. 엄청나게 많이 읽기는 하지만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권수를 늘리는 데 그친다면 그건 우리가 얘기하려는 리터러시나 읽기의 힘과는 상당히 떨어진 결과로 가는 거죠.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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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키워드는 '일상'이에요. 대담을 통해 공론장과 소셜미디어,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는데요. 사실 리터러시가 가장 필요한 영역은 매일 겪는 일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인프라스트럭처라는 거시적 관점과 함께 '작지만 중요한 일들'에 천착하는 리터러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글로/말로 사과하는 법', '소셜미디어에서 답글 다는 법', '강의 평가란에 건설적인 코멘트 남기는 법', '택시기사와의 원하지 않는 대화를 이어가는/종료하는 법',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는/양보 받는 법', '식당에서 기분 좋게 추가 주문하고 음식 받는 법', '조별 활동에서 상처 주고받지 않고 소통하는 법', '칭찬에 답하는 법', '격한 감정을 표출하는 글에 대응하는 법', '문자메시지/이메일 쓰는 법', '헤드라인만 보고 반응하지 않는 법', '아재개그의 유혹 참아내는 법', '우아하게 불만을 제기하는 법'과 같은 리터러시 행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상처주지 않고 말 건네는 법', '말하고 글 쓸 필요가 없는 영역으로 사라지는 법'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 번째 키워드는 '반복'입니다. 독서를 할 때 텍스트 자체의 이해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죠. 그런데 책을 처음 읽을 때는 텍스트 이해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어요. 다시 한 번 읽을 때에는 전자에 할당되는 자원이 확 줄어들면서 경험을 두텁게 만드는 데 쓸 수 있는 자원이 확연히 커져요.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면에서 제가 읽는/보는 행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정을 약속하죠. 영화 감상이건 독서건 '반복'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 되는 거예요.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 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에요. 여러 사람이 "다시 읽지 않았다면 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다시 읽기의 이런 속성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많이'보다 '반복'의 힘에 주목하는 리터러시를 상상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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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제가 말하는 '리터러시'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역량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마무리의 시작을 리터러시 앞의 '삶'에 대해 감히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삶의 리터러시, 삶을 위한 리터러시란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입니다. '옮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삶을 억압하는 리터러시가 아니에요. '좋은 삶'을 생각하도록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 삶의 리터러시입니다. 이런 점에서 리터러시는 모두를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며, 그 자유로운 사람들이 서로서로 다리를 놓으면서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각자의 몸, 그리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로가 책이 어떤 시대에 어떤 세대의 사람들에게 몸이어쏙 그 몸에 새겨진 무늬였으며 몸의 변신 수단이었고 그 사람들의 말이었다면, 지금은 이미지와 유튜브가 몸이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이자 말이며 변신 수단이 된 시대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그 몸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겠죠. 그 변신 수단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몸을 보호하는 법 또한 배우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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