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너의 책은 두 권이 번역되었다. '교육과정이론이란 무엇인가'가 쿠레레를 다각도로 설명한다면, 이 책은 좀 더 문학적인 에세이이어서 파이너의 문제의식이 섬세하게 감지된다. 교육은 궁극적으로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것은 외부 세계나 사회체제에 대한 관심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개인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과정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가 자서전적 방법(쿠레레)에 천착하는 이유이다. 파이너에 따르면 외부 세계가 내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를 분석하지 않고는 자신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 파이너의 책을 더 읽고 싶은데 원서는 엄두가 안 나고...ㅠㅠ 이 두 권에 만족하려니 너무 아쉽다. 번역은 이 책도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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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위험스러운 모든 것을 자신과 연결 짓는 강박으로 나타나는 자기애적 수용에 국한된 경우를 제외하고, 자서전은 자기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외부 세계로 향한다. 그루메가 주장하듯 "교육과정에서, 우리는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을 지향한다."
"무슨 지식이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인가?"는 정전적인 교육과정적 질문임과 동시에 자서전적 질문이다. 그 질문은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이 관련되고 (일부) 영향을 미치는,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제에 직면한 개인들에 의해서 제기되는 질문이다. 항상 열려 있으며 진행 중인 질문으로서, 이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주위의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처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학문적 지식을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무슨 지식이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인가?"는 개인의 몰두, 그리고 대학 혹은 이외의 장소에서 발견되고 만들어진 학문적 지식으로 이루어진 집단의 관심에 따른 탐구에 대한 끊임없는 자극이다. 교육은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다. 그 기회의 질은 가르치는 사람들의 세련된 인지적 능력과 학생들에 대한 진정성에 달려 있다. 교사의 세련됨은 무엇보다도 지적인 것으로서 주관적이고, 사회적이며 세계적이다. 교사들은 정부의 권력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관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학자이자 예술가이며, 개인적임과 동시에 대중적인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치고자 하며, 자신들이 모르는 것은 인지하고자 하고, 마지막으로 다른 이(주로 학생)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만의 탐구의 여정을 하도록 일깨우고자 노력한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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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교육의 본질을 외부의 세계에서 찾아왔다. 나는 개인의 외적 세계(교육과정 자료, 교수기술, 교육정책 지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외적 세계가 교육에서 하는 역할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외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잠시 접어두고, 내적 경험의 깊이 있는 구조적 연구/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p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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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잃어버린 주관성을 되찾고 동시에 자신을 근원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사회적, 역사적 역할을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만큼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있다. K의 경우가 보여주듯 이 변화는 인지적 요소를 포함하지만 전적으로 인지적 과정일 수만은 없다. 그 인지는 당면한 경험을 이해/해석하고 그것을 전해줄 수 있는 인지라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이해는 근본적으로 마음과 몸의 관계이며 존재하는 방식이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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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K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자신의 주체적 경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같다. 그의 생각은 자유 연상에 의한 유연한 생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협상된(합의된) 생각이다. 근본적인 경험으로부터 멀어진 K의 부차적 경험은 사무적이고 따분하며 생기가 없다. K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탐구할 수 없다. K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소설이나 시를 이용하지 않고 주체성을 묘사할 수 있을까? 명백하게 주체성은 정형화된 즉 객관화된 지식이 아니다. 윌리엄 얼이 이야기하듯이 주체성은 올바른 의견의 집합이 아니며 반역사적인 즉 보편적인 과학을 통해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은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만약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내가 예로 든 보편적 법칙 혹은 원리라면, 그리고 만약 내 생각이 옳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특이성을 간과하고 단지 많은 예측 가능한 측면만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안다'는 것은 보편적인 '자신'을 알거나 개념적으로 인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특이성을 반성적으로 이해/설명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자기지식도 객관적 지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나 자신을 한 대상으로서 아는 것이 지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도 본질적으로 '나'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주체를 한 객체로 안다는 것은 그 주체를 그것이 아닌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자기인식은 과학적 관점에서 다른 주체들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타당성이나 진실성 등으로 객관화된 지식일 수 없다. 어떤 자기인식이든 사회적 동의에 의해 구체화될 수 있는 한 개인에 대한 의견일 수 없다."
내 목적은 나의 특이성, 주체성, 자기자각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는 보편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는 사회과학적인 것이다. 나는 K의 은행에서, 이 시대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교육과정 분야에 있는 많은 이들이 한 가지 관심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창문'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보는 것을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기록할지 알지 못한다. 나는 어떻게 나 자신으로부터 이 추상적인 언어를 벗겨낼 수 있을까? 어떻게 주체적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마도 자서전이 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으로서의 감촉과 리듬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은행을 벗어나야만 한다. 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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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교육적 경험의 자서전적 글은 그 글을 쓰는 사람 그 자신의 발달을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과정은 쓰이는 말들이 그 현장 자체를 위해 그리고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위해 쓰일 때 구체화된다. 이 과정은 그것을 통해 얻어진 정보가 그것의 가능한 자의적인 기능을 더해주게 된다. 여기서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자서전적 연구는 우리에게 문학의 장르로서가 아니라 의식의 형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자서전적 연구는 끝없는 작업이다.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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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지적 작업에 스며 있는 자신만의 길이 보인다. 예를 들어 융은 자신이 쓴 책들이 다른 정신분석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그것을 자신의 개별화를 통해 얻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실제적인 연구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마음 속 어느 곳에서나 화음을 울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자서전적 연구 또한 주의 깊은 탐구와 본질적 경험의 이해를 통해 개인의 교육적 여정을 나타낼 수 있다. p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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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교사는 교육이나 배움이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직업적 역할에만 전념하고 있다. 미묘하게 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다른 이들의 것만을 취한다. 갖가지 연구 혹은 조사들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허무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일들을 한다. 더욱이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해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한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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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적 글쓰기를 통해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 모두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올니는 "자서전적 글쓰기와 시적 글쓰기 모두 창조와 재창조의 활동이며,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것의 가능한 질적인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으로 변화시키는 '개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는 작업'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삶의 질적인 의미를 인식하는 것은 과거를 드러냄으로써 가능하다. 굳이 말하자면 자아를 흔들어 어떤 부분을 추출해내는 엑소시즘을 생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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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배움'과 '교육'과 같은 단어들을 마치 그것들의 무의미함을 확신시키려는 듯 지속적으로, 의례적으로 사용하면서 학교와 다른 이들이 학교의 본연의 역할을 '훈련'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진로교육과 직업교육을 지속적으로 강조함에 따라 그러한 착각과 오해 또한 증가되었다. (...)
'가르치는 일'은 '지시나 설명'으로 전락했다. 휴브너가 지적했듯이 '윤리적이고 심미적인 활동으로서의 교육과 교육과정의 이해'는 '예상과 통제에 사로잡힌 기술적 활동'으로 바뀌었다. p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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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방적 작업으로 주장하는 쿠레레는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정치적인 해방적 노력이 명료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미묘한 알아차리기 힘든 작업으로 생각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치적 요소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 중요성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해방적 작업은 여러 다른 단계적 혹은 영역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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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 초점을 둠으로써 '추상화로부터의 회복'과 이데올로기 속에 갇힌 개인의 해방이 가능해진다. 개인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쿠레레의 네 단계(회귀, 진보, 종합, 분석)를 통해 우리는 지적, 문화적 조건화로부터 우리 자신의 해방을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학문적 작업을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세계와의 변증법적 관계(수동적이 아닌)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작업이 결코, 정치적으로 소극적이거나 정신적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반대로 쿠레레는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압력(어쩌면 우리의 의식 기저에 묻혀 있을 수 있는, 또한 우리의 전기적 상황의 그물망을 형성하는)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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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한 개인이 교육적 경험을 설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물론 교육과정은 반드시 계획되어야 하고 학교 브로셔에 소개되어야 한다. (...) 하지만 한 개인이 다른 이의 경험을 예측하고 설계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교만(혹은 종교적으로 말하면 신에 대한 불손)이다. 교사의 계획에는 그들의 개성/독특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교사들에게 행동적 목표를 기술하게 하며 과학적으로 계획된 교수 과정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것은 교실을 비인간화하는 것이며, 교사들을 관료화하는 것이며, 교사들의 교수, 교과, 학생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p18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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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설계나 계획은 가능한 만큼 비공식적이며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로써 교사 개인이나 그 학과의 관심이나 선호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할 수 있는 자율성과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결국 컴퓨터나 텔레비전으로 상영되는 강의가 아니라 교사의 '존재', 그들의 몸짓, 그들의 말 이면에 있는 마음 상태를 공유하고 학생들이 교육적 경험의 구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교사의 어떤 재능이다.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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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학생은 읽는 동안 관심을 끄는 단어, 문장, 혹은 단락에 표시하거나 메모한다. 그것은 문학적으로 잘 어울리는 것일 수도 있고, 많은 생각을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첫 번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깊이 숙고하며 읽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해석하지 않고 텍스트에 집중하기만 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학생의 흥미를 돋구거나 놀라게 하는 것)이 그/그녀의 읽기의 표면적 내용이다.
읽기를 마쳤다면 이제 선택하거나 메모한 단락들을 다시 살펴보며, 어떤 (만약 있다면) 주제나 개념이 두드러지는지 살핀다. 그 학생은 자신의 흥미 외에 선택을 위한 어떤 기준도 없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들이 다소 우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선택한 구절들을 보면 그 학생이 그 소설의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끌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주제들이 그 학생의 관심을 대표적으로 나타낸다. 각각의 주제에, 예를 들어 '관계', 해당하거나 관련 있는 쪽 번호를 적는다.
두 번째 단계가 끝나면 이것들을 잠시 제쳐둔다. 다시 그는 각각의 주제와 그것이 가리키는 구절들을 살펴본다. 그는 각각의 주제가 가리키는 구절이나 문장에 기초해서 짧은 글을 자유롭게 쓴다. 이 글쓰기는 여전히 텍스트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 소설이나 그 소설 작가의 관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구절들은 그 소설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흥미에 기초해서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텍스트는 피험자가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텍스트에 관한 것만큼 피험자 자신 내의 경험 또한 보여주는 일종의 로르샤흐 테스트로 사용되었다. 이 주제의 설명은 읽기 과정을 변화(왜곡)시킨다. 이는 물론 교실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왜곡이다. 사진사가 사진을 확대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부분을 자세히 또렷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 또다른 스케치 하나가 필요하다.
이것은 이전의 단계와, 그 텍스트 자체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필요한 스케치는 우리가 '독자의 전기적 상황'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는 신중하고도 모호한 표현으로서 읽기 과정 동안 일어난 그 학생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자신의 삶은 그가 텍스트 읽기에서 선택한 부분들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텍스트 읽기에서 얻은 것을 염두에 둔 채 우리는 그 학생에게 '관심이나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전기적 현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묘사하도록 요구했다. 이 단계가 끝나면(여기서 끝난다는 의미는 약간 모호하다. 떨어지는 물방울에 대양이 있는 것처럼) 그 두 그림들을 나란히 놓고 어떤 일관성이나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핀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확대된 텍스트와 독자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 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를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다. p18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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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다는 것은 역할로부터, 개인 간, 경제적, 정치적 영향 속에서의 복잡한 양상의 역할에 자신을 빼앗기는 과정이다. 사실 랭이 이야기한 거짓된 자기 체제와 억압적인 경제 체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억압과의 투쟁은 두 '영역' 모두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경제 체제와 헤게모니의 이해와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자기 체제' 안에서 또한 그러한 분석의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개인의 삶에 대한 탐구는 그러한 개념이나 관점 안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더욱 자유롭게 '걷잡을 수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 이 작업은 신체의 회복, 감정의 회복, 그리고 추상적인 자아에 가려져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존재한 원초적인 자아의 회복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이해가 해방적인 변화에의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지만,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경험을 반성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p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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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본주의 시대에 교육기관 내애ㅔ서 실제적 존재와 실제적 자기 이해를 찾아보기란 힘들다. 따라서 '본질로 돌아가라', '실제적인 목소리를 탐구하라'는 요구는 정치적임과 동시에 인식론적이며 교육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정치적/문화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괄호치기와 거리두기를 필요로 한다. (...)
'중심진리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잘못된 가치나 거짓 자기의 세계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 것이다. (...)
집으로 돌아오면 그럼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어쩌면 '실제성'은 그럴 수도 있지만, 교육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지금까지 형성된 나 자신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만일 지금까지 형성된 내가 동성애혐오주의자, 인종주의자, 여성혐오주의자라면 어떠한가? (...) 그러한 특정한 과거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서 개인은 논리적으로, 기도나 혹은 다른 종교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어쩌면 학습을 통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 즉 자기 이해를 위해서 어떤 태도와 행동이 적절한가? 라는 질문을 하기 위한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p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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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화적 신화는 개인적 신화와 얽혀 있다. 어떤 면에서 자아의 구성은 신화적 요소 특히 그것의 문학적 하위 분야인 이야기와 함께 이루어진다. 우리는 가족, 학교의 역사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다. 우리의 개인적 이야기들은 우리가 속한 문화의 이야기 안에서 일어나거나 함께 일어나기도 하며, 간혹 문화적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반박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자아는 '마음에 그려지는 전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어떤 가공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심미적인 창조다. 자아는 '이야기하기' 그리고 '신화 만들기'를 통해 만들어진다.
교사와 학생의 해석을 거부하고 그들을 주변부로 내모는 교육과정은 자아를 단지 하나의 구성요소로 무너뜨리거나(백과사전과 같은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자신들의 생각은 거의 없는 전형적으로 복종적인 교사와 학생) 멀어지게(소외된 자신으로 물러나게) 한다. 즉 처음 그대로의 에고로 돌아가게 한다. 이 에고는 과다결정되고 응결된 에고, 실제적인 문제들과 통합되려 하나 할 수 없는 따라서 실제적인 것에 이를 수 없는 에고다. 자아의 구성을 위한 실제를 구성하는 것을 포함한 교육과정의 가능한 교육적 기능은 '신화 만들기'와 '이야기'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p28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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