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다고지의 부제 '억눌린자를 위한 교육'이 순간 '억눌린 교사를 위한 교육'으로 읽히다니!!! 최근 스트레스를 어지간히 받았나보다. 온라인개학과 함께 밀어닥친 온갖 공문과 세부 지침, 수정 공문에 넌덜머리가 난다. 기본만 정해주고 자율적으로 좀 하면 안 되나. 시수 계산이 그렇게 중요한가.
초임교사 시절에 읽은 이 오래된 고전을 다시 펴든 이유는 뭔가 위로가 필요해서였다. 무엇이 교육이고 교육이 아닌가. 복잡하고 혼란한 상황에서 마음의 줄기를 잡아주는 것은 언제나 교육철학이다. 그게 철학의 역할이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프레이리가 과거 브라질에서 목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억압은 없다. 그러나 지금 이 디지털시대에는 억압이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미시적 통제이다. 강하게 군림하는 권력은 없지만 온갖 세부 지침을 잔뜩 만들어놔서 사람을 옴쭉달쭉 못하게 만든다.
프레이리는 말한다. 억눌린자는 억누르는자의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에겐 자유가 없다. 억눌린자는 억누르는자의 삶을 동경하거나 억눌린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거나, 그렇게 길들여진다. 교사들이 승진파와 순종파로 대체로 양분되는 것처럼.
이때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억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은 세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이름 붙이고 질문하고 해석하면서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조정하고 재발명하는 과정에 진입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간화의 길이며,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이며, 탐구와 실천이다. 그리고 이것이 프레이리가 이야기한 교육의 참모습이다.
'은행저금식 교육 vs 문제제기식 교육'은 프레이리의 이러한 교육관을 간명하게 전달해주는 개념이다. 지식을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것 같은 은행저금식 교육은 현실에 침투할 힘이 없으며 결국 삶에 대한 숙명적 태도를 낳는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감으로써 현실을 더 폭넓게 인식하고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여 현실 문제에 도전할 때 우리 삶의 소외는 줄어든다. 현실과 생생하게 대면할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질문이다.
소외는 민중해방의 기치를 높였던 프레이리 시대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 글로벌자본주의 시대에 소외는 더 다양하고 은밀한 형태로 우리 삶에 번져 있다. 우리 자신이 한갓 거대한 체제의 부품에 불과한 것 같을 때도 있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인간화'는 여전히 우리의 소명이자 교육의 궁극적 지향이다.
"탐구를 떠나서는, 실천praxis을 떠나서는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되지 못한다. 지식이란 발명과 재발명을 통해서, 인간들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그리고 인간 상호간에 추구하는 부단하고, 의욕적이고, 희망적인 탐구를 통해서만이 출현하게 된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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