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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유럽, 중동

예술가의 혼이 있는 도시 / 스페인 바르셀로나 (1)

by 릴라~ 2018. 12. 16.

바르셀로나는 특별한 도시이다. 바르셀로나의 특별함은 바르셀로나가 까딸루냐 지방의 주도로서 오랜 역사를 간직해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중해에 자리잡아 1월에도 봄처럼 온화한 날씨, 산과 바다를 모두 갖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여행자들이 반하는 바르셀로나의 첫 번째 매력은 바르셀로나가 지닌 친화력이다. 빠리나 로마처럼 화려하거나 웅장하진 않지만, 바르셀로나는 그들 도시의 '거만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EU에서 서너번 째 부유한 도시임에도 사람들은 잘 웃고 소박하고 친절하다. 아무리 좁은 도로에도 인도가 있으며, 중심가에는 차로보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훨씬 넓은 점도 이 도시의 인간적인 매력을 배가시켜 준다. 

바르셀로나는 15세기 신대륙으로의 첫 항해를 마친 콜럼버스가 귀환하여 이사벨라 여왕을 알현한 장소이다. 그래서 바닷가에 콜럼버스 동상도 서 있다. 스페인에서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바르셀로나에 독특한 색깔을 부여하는 건 단연 19~20세기의 예술가들이다.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은 피카소가 그림 공부를 하며 오갔던 보른지구에 자리잡고 있다. 전시 작품이 3천여 점이어서 피카소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특히 청색기의 작품이 유명하다. 이후 그는 프랑스, 미국 등지에 생활했고 프랑코 독재에 반대하여 스페인에 민주화가 오지 않는 한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전시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래서 '게르니카'는 프랑코 사후에 스페인으로 돌아오는데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마드리드(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있다. 

호안 미로도 바르셀로나 출신이다. 피카소 그림이 개인적으로 내 취향이 아니었던 탓에 내게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미술관은 호안 미로 미술관이었다. 호안 미로 미술관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는 몬주익 언덕에 있다. 이 언덕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마라토너 황영조가 올라간 길이기도 하다. 내게 피카소와 미로는 상반되는 매력을 지닌 화가였다. 피카소는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이미 스무 살 전에 고전주의 스타일을 완벽히 재현했고 그것을 벗어난 새로운 작법을 추구했는데 특히 아이처럼 자유분방한 그림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아이가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어른의 그림이 피카소의 그림이라면, 지성적인 피카소가 닿지 못한 자유로운 동심, 그 물 흐르는 듯한 밝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심을 표현해낸 작가가 호안 미로였다. 

미로는 스페인 국민화가로 불릴 만큼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화가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그림에서 번지는 특별한 생기 때문이 아닐까.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미로가 보여주는 동심에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 것 같다. 아이의 이리저리 신나는 낙서를 모방한 것 같은, 그 낙서에 활달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부여한 그림들은 하나같이 몽환적이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동심으로의 초대. 미술관의 분위기도 작품의 성격을 따라가는 듯했다. 피카소 미술관이 사진 촬영 금지에 방마다 지키는 사람이 있어 굉장히 고압적인 분위기였다면(한 방에 수백억짜리가 여럿 걸려 있었으니), 미로 미술관은 사진 촬영도 되고, 유치원 아이들도 견학을 오는 등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살바도르 달리의 고향도 까딸로냐다. 바르셀로나에서 기차로 두 시간쯤 걸리는 작은 마을 피게레스가 달리의 고향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일정에 여유가 없어 들르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피게레스, 지로나 등 바르셀로나 인근 소도시도 둘러보고 싶다. 

바흐의 무바주 첼로 모음곡을 부활시킨,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도 까딸로냐 출신이다. 바르셀로나 인근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파블로 카잘스의 생애는 한 음악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위대하다. 프랑코 독재에 억압받던 동족을 지극히 사랑했던 카잘스는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집권을 인정하는 나라에서는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십년 동안 첼로 연주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코가 살아있는 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아 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모두 까딸로냐 출신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까딸로냐의 오랜 역사, 지역적인 색깔, 민족주의 정신이 이들 예술가들의 영감의 토대가 되었으리라. 스페인은 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내전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지만 그것이 이들 예술가들의 창작을 가로막진 못했다. 특히 까딸로냐 지역은 스페인에서 프랑코독재에 끝까지 저항했던 지역이었다. 다분히 사회주의, 공산주의 성향이었던 피카소는 작품에 자신의 반전 정신을 그려내었고, 카잘스는 동족의 아픔에 공감하여 연주를 중단했다. 호안 미로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인 편이었기에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고, 달리는 이들 중 유일하게 프랑코 정권에 찬성하여 피카소와 사이가 별로였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유럽의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프랑코의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몰려들었다. 조지 오웰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가톨릭이 프랑코 편을 들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자들은 바르셀로나의 성당을 부수곤 했다. 하지만 가우디가 설계를 맡은 '사그리다 파밀리아(성가정 성당)'는 그 신비한 매력와 예술적 가치 때문에 살아남았고,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이를 비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조지 오웰이 '사그리다 파밀리아'를 왜 안 부수냐며 혹평하는 대목을 읽으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바르셀로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 가우디는 당시의 새로운 사상적 조류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 당시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수도원과 성당 등 스페인의 오랜 역사적 유물을 잿더미로 만든 사건이 곳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지으면서 노동자의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먼저 성당 한쪽에 마련할 만큼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썼는데, 그의 애정과 연민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시대의 타락이 신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등의 분위기에 있다고 보았고, 시대를 속죄하고 가톨릭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사그리다 파밀리아 건축에 몰두한다. 하지만 가우디의 위대함은 복고주의에 있지 않다. 그는 카탈로냐의 오랜 건축적 양식의 확고한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 자연으로부터 받은 독창적인 영감과 그만의 천재적인 발상으로 건축에 있어서 굳건하게 자기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지금의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는 20세기 미술사의 향방을 결정한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거장, 피카소, 달리, 미로의 도시이자 가우디가 부활시킨 종교적 영감 또한 충만한 도시이다. 전통과 혁신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곳, 그속에서 나는 예술이 어떻게 시대를 이끌어가고 만들어가는지를 느꼈다. 한 시대, 한 도시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자기 땅의 정신적 토양으로부터 새로운 혼을 발견하고 다듬어내는 예술가들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 곳이 바르셀로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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