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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 '마음을 다하는' 태도야말로 독자를 향한 경의의 표시인 동시에 언어가 지닌 창조성의 실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는 '당치 않게 새로운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가 지닌 창조성은 독자에게 간청하는 강도와 비례합니다. 얼마나 절실하게 독자에게 언어가 전해지기를 바라는지, 그 바람의 강도가 언어 표현의 창조를 추동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학교교육에서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언어 실천을 추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경의의 표현은 단지 '존댓말을 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커다란 잘못입니다.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에 따르면 '경'이라는 글자의 원뜻은 "신을 섬기고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경의를 표하는 상대는 원리적으로 언어가 전해지지 않는 상대입니다. 상대가 신이니까요. '경'의 원뜻 가운데 지금은 '심사하는 상위자에 대한 공포'만 남고 '온갖 수단을 다하다'('경'의 갑골문자는 '포로의 목을 쳐 희생물로 바치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무섭죠?)라는 수행적인 자세는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채 신물 날 정도로 다양한 글을 읽고 또 스스로 대량의 글을 써온 결과, 나는 '글쓰기'의 본질이 '독자에 대한 경의'에 귀착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실천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p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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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바보의 벽', 우리 내면의 '평범함의 경계선'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쓰는 일은 고역일 따름입니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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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도 '생명이 있는 언어'와 '생명이 없는 언어'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높여주는 언어가 있는가 하면, 살아가는 힘을 잃게 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 차이를 감지해서 생명력이 느껴지는 언어만 선택적으로 찾아내는 능력이야말로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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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향해 잠수해가는 행위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어디까지든 한없이 들어갑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개별성이나 개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이상까지 뚫고 나가버립니다. 그는 '광맥'이라고도 하고 '어둠'이라고도 합니다. '우물'이나 '지하실' 같은 비유를 사용할 때도 있지요. 자기 내면으로 깊숙이 내려가면 고유성의 존재 따위는 꿀꺽 삼켜집니다. 도도한 마그마의 흐름까지 도달하면 그곳은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인간성의 가장 밑바닥에는 만물이 생성하는 마그마가 꿈실거리고 있습니다. 그것에 가닿는 것은 '지옥 순례'와 비슷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속 깊이 내려가 뜨겁게 질척거리는 마그마를 만나고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계랄까, 어둠이랄까, 여하튼 지하의 동굴 같은 곳으로 끝없이 내려가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만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으면서 그곳에 인간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경험한 다음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소설가가 할 일입니다. '가보고 나서 돌아오는' 점이야말로 작가의 기술이나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그마가 있는 장소를 '지하실 밑에 있는 지하실'이라고 불렀습니다. 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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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도 책과는 우연히 만나야 합니다. 친구가 '이것 좀 읽어봐, 정말 마음에 들 거야.' 하고 추천해서 책을 읽으면, 재미는 확실히 있을지 모르지만 '숙명의 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여름방학 과제로 읽어야 해서 읽은 책도, 찬사 가득한 서평을 받은 책도 안 됩니다. 타인의 평가가 끼어들었으니까요. 그런 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이 책이 내비치는 아우라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야' 이런 서사가 성립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서점 안을 걷고 있었더니 '책과 눈이 맞았다',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마침 내가 읽어야 할 것이 쓰여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착각입니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언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토소스'를 보고 '토마스 만'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니까 말입니다.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나도 책을 웬만큼 많이 읽어왔지만 '이 책을 읽었다, 이 말에 감동했다'는 기억이 실은 착각이었던 경우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나중에 출전을 확인하려고 들추어봤더니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그런 말이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본인은 그 책에서 그런 말을 읽었다고 기억하지요. 그 글을 읽고 감동해서 삶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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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의 책'이 되려면 오로지 나만이 '다른 사람이 가치를 깨닫지 못한 책'과 만났다는 서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추천이 아니라 자기가 자연스럽게 그 책에 반해버렸다는 서사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튼 '우연한 만남'이어야 합니다. 우연이 아니면 숙명이 아닙니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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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자가 미개사회에 찾아가 민족지 자료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왕성한 호기심과 경의를 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세설'을 썼습니다. 이것은 '외지에서 온 인간'이기 대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현지의 인간은 자신들의 제도와 문물에 대해 이렇게 진지한 호기심이나 경의를 품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보편성이 있습니다. 읽어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인이든 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알 수 있습니다. '외부의 시선'으로 쓴 글이니까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세계문학은 자신이 있는 곳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인 문맥을 공유하지 않는 타국의 독자들과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나눌 수 없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는 것에 대해 독자는 글쓴이가 '자신과 똑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장소'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거리이기 대문에 약간 소원한 대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면 외국인이라도, 시대가 몇 백 년쯤 떨어진 사람이라도, 왠지 모르게 자신도 그 텍스트의 정통적인 독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세계문학이라면 글쓴이가 바로 자기 옆에 서서 '이봐, 저것은 어떻게 생각해?' 하고 작은 소리로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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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계층사회란 단지 권력이나 재화나 정보나 문화자본의 분배에 계층적인 격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계층적으로 행동할 것을 강제하는 표준화 압력 자체에 격차가 있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지요. 계층적인 에크리튀르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유동적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상위 계층 사람은 노동계급의 패션이나 음악을 즐길 수 있고 외국에도 나갈 수 있습니다. 정치체제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음식문화가 다른 곳에 가도 그곳 사람들과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문화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습니다. 하위 계층의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와 만나든, 어디에 가든, 자기 동네에 있을 때와 똑같이 언어를 사용하고, 똑같이 행동합니다. 엄격하게 틀에 끼워 맞추어놓은 바람에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타자를 응접할 때 드러나는 자유로움의 차이가 사회적으로 성공할 기회에 뚜렷한 격차를 초래합니다.
계층적인 에크리튀르를 깊이 내면화해버린 사람은 스스로 자유롭게 독창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실은 주어진 대사를 그대로 읽을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자기 계층에 못 박고 있지요. 사회적 유동성을 결여한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최하층으로 쓸려갑니다.
계층사회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상위 계층에 자원이 배타적으로 축적될 뿐 아니라 계층 격차가 벌어지도록 역동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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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그래, 그래'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마지막까지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프랑스인 6천만 명 중에서 기껏해야 10만 명쯤 되겠지요. 롤랑 바르트 자신도 그 정도의 한정된 독자 집단을 상정하고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어려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아니, 어렵게 글을 씀으로써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끼리 읽는 것'이지 프랑스인 전체를 상대로 쓴 것이 아닙니다." 하는 '꼬리표'를 붙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불문과 학생이었을 무렵, 이런 글을 읽으면서 '어째서 프랑스 철학자는 글을 어렵게 쓸까?' 하고 한숨을 내쉰 적이 있습니다. '누가 읽어도 알 수 있는 일본어'로 도저히 바꾸어 쓸 수 없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20년, 30년을 계속 한탄해오다가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누가 읽어도 알 수 있는 일본어로 바꾸기'라는 기획 자체가 번지수가 틀렸다고 말입니다. 처음부터 독자를 한정해서 쓴 글이었습니다.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정치적 상황에 관여한, 같은 지적 수준의 독자를 상정해서 쓴 글이었습니다. 따라서 '알기 쉽게 바꾸어 쓰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일반 독자에게는 '해독 불가능'해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해독불가능한 것이 좋습니다. 오랫동안 번역을 해오면서 이제야 겨우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언어 사용은 그 자체가 계층 형성적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의미를 알 수 없어' 하는 독자는 '파티에 초대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뜻이지요. '너는 네 친구들과 파티를 즐겨야.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니까.' 롤랑 바르트도, 푸코도, 데리다도, 라캉도, '어째서 여러분은 이렇게 어렵게 글을 씁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내 글이 어렵다고? 그건 네가 독자로 상정되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읽지 않아도 돼." p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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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을 짐작할 수 없을 때는 '살아남기 위한 리터러시'를 향상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는 패션이 어떻다든지, 어떤 자동차가 빠르다든지, 어느 레스토랑이 맛있다든지, 어떤 주식을 매수할 때라든지 하는 '팔자 좋은 이야기'를 노닥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본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은 괜찮다고 보는 '근거 없이 낙관적인 사람들'이 널려 있지만, 그들은 사회의 극적인 변화를 보지 않습니다. 보고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딴청을 부립니다. 내 친구 히라카와 가쓰미는 오늘날의 일본을 가리켜 '이행기적 혼란'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
일본은 이대로 인구 감소가 지속될 것입니다. 단언할 수 있어요. 인구 감소를 저지하려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기쁨과 성취감은 이해 득실로 따질 수 없다'는 정상적인 식견이 상식으로 재등록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인의 과반수가 '상식을 제대로 알아보는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안타깝게도 현실성이 없습니다.
인구가 줄고 시장이 축소하고 경제 성장도 끝나고, 노인만 증가합니다. 15년 후에는 65세 이상이 총인구의 30퍼센트에 달합니다. 45년 후에는 여러분이 65세쯤 될 즈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전대미문의 사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성공했었지.' 하는 성공 체험의 전례가 없습니다. 스스로 대책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살아남기 위한 리터러시'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마음은 우리 세대보다는 여러분 세대에 더 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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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입장'을 아는 사람,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 자신이 어떤 국면에 어떤 책임을 지도록 기대를 받고 있는지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어른'입니다. '입장'도 '분수'도 '주제'도 공간적인 표현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감으로 볼 줄 아는 인간만 그런 것을 압니다. 사회적 성숙이란 단지 신체가 성장하거나 지식이 있거나 유용한 기술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화할 수 있는 타자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상공에서 '자신을 포함한 풍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스캐닝이 가능한 범위는 어린이의 경우는 기껏해야 가정까지입니다. 그것이 동년배 집단으로 넓어지고, 친척 집단이나 지역 공동체까지 넓어지고, 이윽고 국민국가나 국제사회, 나아가 인류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놓을 수 있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성숙의 과정을 추동하는 것은 가상적으로 동일화하고 싶다는 근원적인 추향성입니다.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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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가 동기화하면 자신의 신체 안에서 자기도 몰랐던 감각이 생겨납니다. 전대미문의 감각이지요. 그것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난 사건'인 이상 언어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생각이든 감정이든 갓난아기 때부터 어휘를 증가시키고 수사나 논리를 배워 언어화할 수 있도록 해왔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도 할 수 있는 일을 어른이 못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프랑스어를 어떻게든 일본어로 바꾸어봅니다. 자신의 신체에 제대로 반응을 일으키는 일본어가 아니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실마리는 그것뿐입니다. '가슴이 답답한' 것은 번역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속이 시원한' 글을 쓰면 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레비나스처럼 심원한 사상가는 나 같은 이해력이나 경험지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수준의 예지를 설파하기 때문에 '알기 쉬운 일본어'로 간단하게 옮길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신기하게도 탄력을 받아 '의미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군' 하는 글이 써질 때가 있습니다.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지성적으로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가슴이 답답하지 않다'는 것은 생각이든 감각이든 내가 신체적으로 동기화하고 있다는 징후입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있잖아, 그것 마링야. 아아, 머릿속에서만 맴도네...' 하고 애를 태울 때가 있잖아요? 신체적으로는 감을 잡았지만 아직 언어화에는 미치지 못한 상태 말입니다.
지성의 수준이나 스케일을 뛰어넘는 앎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바란다면, 어떻게든 '가슴이 답답한' 영역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발생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이가 언어를 획득해가는 과정은 실로 '가슴이 답답한' 상태의 연속일 테니까요. p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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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도구가 아닙니다. 돈을 긁어모으거나 자신의 지위와 위신을 추어올리거나 스스로를 문화자본으로 장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이렇게 욕망하는 주체 자체를 해체하는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것입니다.
생생한 언어를 습득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신의 외부에 있는 타자에 동기화하는 것, 그것을 통해 기존의 자아를 일단 해체하고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자아로 재편성하는 것, 이런 과정이야말로 생명의 자연에 적합합니다. 따라서 일부러 이익을 이끌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인간은 자연스레 타자의 언어에 가상적으로 동일화하고 타자에 동기화하려고 합니다.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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