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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스토리텔링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 우치다 타츠루 ㅡ 우리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

by 릴라~ 2018. 8. 20.

하루키는 내 취향이 아닌데(옛날에 세 권 정도밖에 안 읽음), 이 책을 보고 다시 하루키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취향이 바뀔 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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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성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세계성을 획득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우리 산 자의 행동이나 판단 하나하나에 심오하고 강렬하게 관계를 맺는 것, 단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의 절박함'이라는 결성적 리얼리티입니다.

 

산 자와 산 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 각지마다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죽은 자가 '존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산 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의 어법'에 의해, 다시 말해 각각의 '맥락'이나 '국어'에 의해 결코 침범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죽은 자가 결성적 방식으로 오로지 산 자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만 계속 써왔습니다. 그 이외의 주제를 선택한 적이 없을 만큼 과잉된 절도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 무학의 순도를 높이고, 그의 문학적 세계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토 노리히로는 최초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통해(아마도 가토 노리히로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본질을 꿰뚫는 결정적인 언어를 기술했다고 봅니다. 그는 올바르게도 이곳에는 '인간이 살지 않는다'고 적었던 것입니다. pp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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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소설에서 의미성이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의미성과 의미성이 어떻게 서로 호응하느냐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발하는 '배음' 같은 것인데, 배음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지만 거기에 몇 배음까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음악의 깊이를 좌우하지요. (...)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몸이 따뜻해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배음이 들어가 있는 소리는 신체에 남습니다. 육체적으로. 하지만 그것이 왜 남는지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거이 서사라는 기능의 특징이지요. 뛰어난 서사란 사람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 제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뛰어나지 못한 서사와 기능적이고 구조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출판 다이제스트, 무라카미 하루키) pp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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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교육을 받은 덕분에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죽음에 대한 생각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원래 상태의 회복이란 죽은 자가 '바로 곁에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 일입니다. 어떤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정성스럽게 챙겨나가면 죽은 자와 교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상식', 즉 인류의 여명기에 통하던 상식을 회복하는 일을 말합니다.


난 지금 오컬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본래 인류의 상식입니다. 다만 그 상식을 아이들에게 단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 제도가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을 뿐이지요. 무도와 문학과 철학은 상식으로 통하는 회로지만, '그런 식으로' 무도를 수련하거나 철학 책을 번역하거나 소설을 읽는 사람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군요.


사회학자가 쓴 글이 별로 재미없는 까닭은 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인간'의 세계에만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능자가 쓴 글이 딱히 재미있지 않은 까닭은 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쪽' 세계를 실체처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할까? 이 문제를 올바르게 주제로 다루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더불어) 그렇지 않은 소수에 속합니다. pp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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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음은 현실음에 기초하여 우리의 뇌가 '어디도 아닌 장소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간주하는 음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무슨 소리'라는 판단도 결국은 뇌가 내리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 배음은 '출처 불명의 소리'이기 때문에 각각의 민족문화 안에서 '하늘에서 들려온다'고 여기는 소리로 인습적으로 규정되어버립니다.


배음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뇌가 만들어낸 소리에 스스로 감동합니다. (...)


문학의 즐거움도 필시 배음의 환희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자기가 지금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언어'를 발견하고 감동으로 몸을 떨지요. '이것은 나만을 위해 쓰인 것으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작가가 내 앞으로 보내준 메시지'라는 행복한 착각 없이 문학적 감동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작가들은 (가수가 그러하듯이) 문학적 배음을 내는 기술을 알고 있습니다. (...)


다른 사람들은 단순한 지시적 기능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문장에서 나만 '내 앞으로 보낸 메시지'를 듣는다는 것이 배음의 에크리튀르가 지닌 구조입니다. pp21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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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형식은 어쩌면 '지금 한순간, 나는 신의 시점으로 세계를 보았다'는 전능의 경험을 원형으로 구축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듭니다. (...)


틈만 나면 되풀이되는 근대문학의 종언이 일컬어지면서도 소설은 웬만해서는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소설 이외에 이러한 전능한 감각을 가져다주는 장치를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pp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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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또 다른 열쇠는 '아버지의 부정'입니다.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다든가 아버지에게 규칙을 배우는 등, 부성적인 지도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이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즉 그들이 자기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지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슬하에 있는 아이에게 세계는 단순합니다. 아버지 말을 듣다가 언젠가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성장 과정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성스러운 천개'가 세계를 덮고 있으니까 세계의 구조도, 자신의 위치도, 무슨 일을 해야 할까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잘 몰라도 '언젠가는 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은 그런 차원을 넘어섭니다. '아버지가 없는 세계, 누구도 내 존재의 근거를 마련해주지 않고, 아무도 신원 보증인이 되어주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 가능한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라카미 문학이 세계성을 획득해온 가장 커다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pp245-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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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디넓은 호밀밭 같은 곳에서 작은 아이들이 한가득 모여 어떤 게임을 하는 모습을 언제나 떠올리곤 해. 몇 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밖에는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건전한 어른 따위는 한 사람도 없는 거야, 나 말고는... 난 근처의 험한 벼랑 끝에 서 있어. 내가 거기에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말이지, 누군가 그 벼랑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아이가 있으면 한쪽 끝에서 붙잡아주는 거야. 한마디로 앞을 잘 안 보고 벼랑 쪽으로 달려가는 아이가 있으면, 어느 쪽에서든 짠하고 나타나 그 아이를 캐치하는 거야. 그런 일을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하는 거지. 호밀밭의 파수꾼, 나는 단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단다."


(...) '파수꾼' 일을 하는 인간이 이 세계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그 하나였습니다. 파수꾼은 자못 애처로운 일입니다. '아이들밖에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필요한 일이지만, 아이들은 파수꾼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벼랑 끝에서 '캐치'로 살아나도 대다수 아이들은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을 테지요.


감사 인사도 받지 못하고, 대가를 지불받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보초' 일은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누군가 해야 하니까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파수꾼은 첫 번째 종류의 인간이 맡는 일입니다. 때로 '아, 내가 함께 할게요' 하며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인간적 질서는 그런 대로 유지됩니다. 그런 사람이 꼭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 세계의 질서는 유지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꼭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 세계의 질서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입니다. pp26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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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것에 의해 훼손되는 경험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벌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험을 반드시 '합리화'하고자 합니다. 애정이 없는 부모에게 괴롭힘당하는 일, 별 볼 일 없는 교사에게 모욕당하는 일, 멍청하고 이기적인 동급생에게 학대당하는 일, 욕망과 자기애로 충만한 이성에게 수탈당하는 일, 자기보다 못한 상사에게 평가받는 일, 뜻밖의 불치병에 걸리는 일 등등 부조리는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경험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고양시키기 위한 교화적인 '시련'이라든가, 우리의 과오에 대한 '징벌'이라든가, 인간을 고도로 이해하기 위한 '교훈'이라든가, 사회제도의 모순으로 인한 '결과'라는 식으로, 합리성으로 봉합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상처나 손해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스템의 결함'이든 '트라우마'든 '미처 태어나지 못한 태아의 앙화'든 상관없으니까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이 그 나름의 인과관계에서 기인한 '합리적' 사건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생각하면 누구든 알 수 있겠지만, 우리를 상처 입히고 훼손하는 '사악한 것'의 대부분에는 손톱만큼도 교화의 요소나 징벌의 요소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어떤 필연성도 없이 우리를 찾아와 마치 농담처럼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상처 입히고 훼손하기 위해 우리를 상처 입히고 훼손하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들이 '사악한 것'에 의해 무의미하게 상처 입고 훼손당하는 경험을 담담하게 기술하면서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써왔습니다. pp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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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손쉽기도 하고, 얼핏 머리가 좋아 보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것은 거기에 적합한 재주를 피운 데 불과한 경향이 있습니다만, 나는 역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야 할 시기가 슬슬 다가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대단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흔하디흔한 것으로 만들어갈 시기가... 반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냉장고를 열어보고 거기에 있는 재료로 무언가 맛있는 것을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 어쨌든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충당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시대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꿈을 꾸기 위해 매일 아침 나는 눈을 뜹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하실 밑에는 또 다른 지하실이 있다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거기에는 대단히 특수한 문이 달려 있어 알아보기 어렵고, 그래서 여간해서는 보통 들어갈 수 없으며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어떤 박자에 실려 훅 하고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근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맛보았던 어둠-전기가 없었으니까요-과 호응하는 어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가 캄캄한 어둠을 더듬어 보통 집 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 결부되어 있기도 하지요. 자신의 영혼 속에 들어가는 일이니까요." (같은 책) p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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