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재밌거나 신선한 책은 아니었다. 그간 고미숙 씨의 책을 꽤 봐와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한 가지에는 찬탄하게 된다. 읽고 쓴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길게, 몇 백 페이지를 할애해서 예찬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 무언가에 이렇게 깊이 감탄하고 그 내용을 풀어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기억에 남는 몇 부분을 적어본다.
##
배운다는 건 곧 책을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책과 신체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을 일러 교육이라 한다. 그래서 독서를 취미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취미활동을 그렇게 오래,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책은 삶의 토대이자 존재의 조건이다. 책과의 만남이 있고 그 위에서 인생이라는 길이 시작된다. p60
##
현대인은 참으로 유능하지만 아주 심각하게 무능한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휴식이다. (...) 제대로 쉬려면 일단 노동과 화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낮의 노동이 힘든 건 노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소외와 압박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소외고, 억지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 압박이다. 그럼 쉰다는 건 이 두가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함께 보내면 된다고?(...) 가족은 감정노동의 현장이다. 감정적인 배설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장, 가족. 20세기 내내 자본과 국가가 그렇게 설정해 버렸다. 어떤 점에선 회사보다 더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한다. 해서 이 배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노동의 스트레스와 감정의 배설, 이 두가지를 벗어나는 관계 혹은 활동, 그게 뭐냐고? 결국 책이다. 책을 읽는 네트워크에 접속해야 한다. p89-90
##
이 대목에서 아주 익숙한 논제를 환기해보자. '사랑이냐? 소유냐?'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과 애착, 사랑과 소유욕을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앎의 의지가 작용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앎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그것은 소유욕이자 집착이다. 거꾸로 말해도 된다. 소유욕이 앞서면 알고 싶지 않다. 그저 가지고 싶을 뿐이다. 알고 싶다면,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 앎이 자신을 설레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앎과 소유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녔다. 전자는 교감이고, 후자는 쾌락이다. 에로스는 로고스를 열망한다는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p95
##
감이당 홈피에 들어가면 상징로고 옆에 네 개의 모토가 새겨져 있다. 도심에서 유목하기/ 세속에서 출가하기/ 일상에서 혁명하기/ 글쓰기로 수련하기. '도심에서 유목하기'는 자본의 한가운데서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길을 열어 가겠다는 것이고, '세속에서 출가하기'는 출가의 핵심이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세속적 삶 속에서도 욕망의 변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의미다. '일상에서 혁명하기'는 다들 깊이 공감할 것이다. 지금까지 혁명은 늘 거대담론의 전망 속에서 시도되었고, 제도와 시스템의 혁신으로 귀결되었다. 그 겨로가 물질적 영역은 비약적으로 진화했지만, 사람들의 일상은 낡은 습속을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상과 습속의 뿌리는 욕망이다. 그것은 제도와 시스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혁명의 전장은 일상이다.
유목, 출가, 혁명 -- 하나같이 존재의 변환을 요구하는 키워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다른 존재가 되기. 여기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계속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물으면서 세상을, 역사를, 그리고 우주를 관찰하고 주시하라. 이것이 바로 읽기다. 만약 동의가 된다면, 그 다음 질문은 간단하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훈련하는가? 강철도 수많은 단련을 통해야만 일용할 도구가 되고 빛나는 보석이 된다. 사유도 마찬가지다. 안다는 건 그 지평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감이 없다면 앎이 아니다. '알지만 됐어!'는 모른다는 뜻이고 그 무지는 냉소가 되어 사방을 얼어붙게 할 것이다. 유목, 출가, 혁명이라는 비전은 일상과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이전과는 다른 곳을 향하는 것, 그리고 그 지평선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의 세 가지 비전은 별 의미가 없다. 해서 '글쓰기로 수련하기'다. 아마 이 지점에서 좀 뜨악할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개혁하고 실천할 것이 많은데 하필 글쓰기야? 그렇다. 하필 왈 글쓰기다. 글쓰기만이 유목, 출가, 혁명을 위한 최고의 실천적 전략이다. p104-105
##
아, 그때 알았다. 글쓰기는 나처럼 제도권에서 추방당한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근원적 실천이라는 것을. 인식을 바꾸고 사유를 전환하는 활동을 매일, 매순간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써야 한다. 쓰기를 향해 방향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생산자가 된다. 들으면 전하고, 말하면 듣고, 읽으면 쓴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온전히 구비되어야 할 활동들이다. 신체는 그 모든 것을 원한다! 어느 하나에만 머무르면 기혈이 막혀 버린다. 막히면 아프다. 몸도 마음도. 퉁즉불통--글쓰기가 양생술이 되는 이치다. p108-109
##
혁명의 전략은 간단하다. 먼저 생명을 창조하는 것의 위대함을 자각할 것. 남녀노소 누구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아이를 낳고 안 낳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오직 생명을 창조하는 활동을 통해서만 우주와 연동한다. 그에 버금가는 행위는 오직 가치의 창조, 다시 말해 지혜의 생성뿐이다. 무지로부터의 해방, 인식의 지도-그리기, 그것 또한 생명활동이다. 그게 뭐냐고? 당연히 글쓰기다. p122
##
더 나아가 왜 신이 언어로 계시를 내리고 예언자나 수행자들이 언어로써 진리를 설파했는지도 알게 된다. 진리는 언어다! 음악도 춤도 아니다. 축구도 골프도 아니다. 이 점을 깊이 사유하고 사유하라! 물론 언어는 감옥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인식과 사유를 얽어맨다는 점에서. 하지만 그 감옥을 폭파하고 탈주하는 것 역시 언어로써 가능하다. 붓다는 외쳤다. 언어도단, 즉 언어의 길을 끊어버리라고. 그리고 그 허공 속에서 십만 팔천 법문을 쏟아냈다. 언어의 감옥을 부수자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언어들이 폭포처럼 쏟아진 것이다. 이슬람은 또 어떤가. 알라는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에게 명확성을 가르쳤다." 명료하게 말하고 명확하게 글로 전달하는 것이 알라의 뜻이라는 의미다. 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낳는 그 마음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 진리에 다가가는 길은 가치의 창조에 있다고. 그리고 가치의 창조는 쓰기의 능력과 분리될 수 없다고. p123
##
"노후대책은 돈이 아니라 일로 하겠다." 개그계의 대부 전유성 씨의 말이다. 그는 30대부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는 건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소유가 아니라 활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관계와 현장, 이 두 가지가 노후대책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현대인에게 가장 취약한 고리이기도 하다. 직장이나 사업에서 은퇴하는 순간, 바로 현장이 사라지고 관계는 핵가족이 전부다. 핵가족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관계인지는 충분히 아시리라. 그래서 아마 더더욱 돈에 집착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정작 문제는 돈이 아니라 관계의 활동이다. 예전의 끈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 전유성 씨가 그렇게 했듯이 진정한 노후대책은 관계와 현장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이다. 그게 뭐지?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크, 이것이 모든 이들의 노후대책이어야 한다. p127
sheshe.tistory.com/94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