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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수업 이야기

“어린왕자”를 다시 만나다

by 릴라~ 2019. 11. 6.

100년 넘게 살아남은 작품. 자기 시대를 뛰어넘은 공감으로 영원성을 획득한 작품. 우리는 이를 고전이라 부른다. 한 학기에 한 권 정도는 고전을 읽히고 싶었다. 헌데 중학교 1학년들 꼬맹이들과 읽기에 마땅한 작품이 잘 없었다. 수준이 제각각인 학생들이 다 소화할 만한 작품을 찾다 택한 것이 <어린왕자>다.

수업을 위해 다시 읽으며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프리카의 고독한 사막 한가운데로 초대된 기분이었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주인공. 남은 물은 일주일치.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놓인 그에게 뜬금없이 어린왕자가 나타나 말을 건다.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여섯 살 이후 화가의 꿈을 버린 주인공은 그림이 뜻대로 잘 안 된다. 양은 이 안에 있다며 양 대신에 상자 하나를 그려준다. 어린왕자는 뜻밖에 기뻐한다. 그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에서 모자만 보았던 어른들과 다르다. 어린왕자에겐 상자 안에서 잠든 양의 숨소리가 들린다.

비행기 수리가 급한 주인공은 곁에서 자꾸 질문하는 어린왕자가 귀찮다. 하지만 부서질 듯 여린 마음을 지닌 어린왕자의 존재를 끝내 외면하진 못한다. 이 아이는 대체 누굴까. 어디서 왔을까. 정체 모를 아이의 말에 점점 귀기울이며 주인공은 알게 된다. 어린왕자가 일 년 전 자기의 작은 별, 소행성 B612를 떠나 이곳에 도착했음을.

왕과 지리학자, 사업가와 술꾼, 허영심 많은 사람과 점등인이 사는 별을 거쳐 지구에 이르기까지 어린왕자의 여정 하나하나가 마음에 남은 이유는 어린왕자가 “정말 이상해”라고 말한 그 세계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언제 시들지 모르는 ‘덧없는’ 한 송이 꽃보다 확실한 가치를 보증하는 것들이 중요한 세계. 돌보지도 못하면서 소유의 목록을 끝없이 추가하는 세계. 슬플 때마다 해넘이를 보았던 자신의 작은 별과 달리 외로움이 뾰족한 산처럼 펼쳐져 있는 세계. 친구를 불러도 자기 목소리만 메아리로 돌아오는 세계.

“꽃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난 그 꽃에 매일 물을 줘요. 또 화산도 세 개 가지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해줘요. 내가 꽃이나 화산을 소유한다는 건 그들에게 유익한 일인 거예요. 하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그다지 유익할 게 없는데...”

셍텍쥐페리는 마흔셋, 정찰비행을 하다 실종되기 일 년 전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한창 사십대를 통과하는 내겐 사막에 불시착해버린 주인공의 처지가 중년에 이른 우리 모두의 자화상 같았다. 갈 길은 멀고 비행기는 고쳐야 하는데 마실 물은 떨어져가고... 그렇게 헤매는 우리에게 어린왕자와 사막여우가 나타나 우리가 잊어버린 낯선 언어로 말을 건넨다. “나를 길들여 줘” “누구든 자기가 길들인 것밖에는 알지 못하는 거야.” “네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은 네가 네 장미꽃을 위해서 들인 시간 때문이야.”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 힘세고 강한 것이 아니라 연약한 마음이 세상을 구하리라 믿었던 작가, 생텍쥐페리. 내면의 사막에서 길 잃은 모든 어른들에게 셍텍쥐페리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존재는 거창하고 위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작고 여리지만 진실한 목소리(어린왕자)라고. 구원은 우리 밖에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 안에 있는 어린 아이로부터 온다고. 그 아이를 만나면 좋겠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옥 같은 문장으로 가득차 있는 작품. 그래서 작품 감상 마지막 활동으로 캘리그라피를 했다. 열네 살 학생들도 그들 눈높이에서 어린왕자의 별과 장미꽃, 바오밥나무와 여우를 만나게 되는 소설이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한 문장은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할 거야.”

“난 죽은 것같이 보이겠지만 정말로 죽는 건 아니야.” 나는 이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기에. 뇌가 정지하면 삶이 멈추고 우리에게 열린 모든 세계도 덩달아 문을 닫아버릴 것 같기에. 우리 아빠가 이 우주에서 영영 사라진 걸까, 문득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는데 이 문장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 앞에서 잠시 멈칫거린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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