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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30년 넘은 벼루와 먹

by 릴라~ 2020. 9. 23.


지난 주말, 경주 구시가지 골목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취연벼루박물관에 들렀다. 왕년에 kbs와 영남일보 기자를 지낸 분이 만든 개인 박물관이었다. 벼루에 빠져 50년 동안 벼루를 천 점 이상 모았다고 한다. 난 초딩 때 서예를 배운 세대라 정말 오랜만에 보는 벼루의 세계가 나름 반가웠다. 80년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전시물을 보니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돌에 따라 벼루의 종류가 달라졌다.

집에 돌아와서 그간 한 번도 풀지 않고 상자 속에만 있었던 벼루를 꺼내보았다. 내가 초등학생 때 쓰던 물건인데 당시 비싼 값에 산 거라서 엄마가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가 이번에 이사올 때 주신 거였다. 보자기를 풀어보곤 깜짝 놀랐다. 벼루 뿐 아니라 내가 초딩 때 쓰던 문진과 큰 붓, 쓰다 만 먹도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먹 상자 뒤에는 초등학생 때 내가 붓글씨로 쓴 내 이름이 있었다. 가는 붓도 몇 자루 있었는데 이건 아빠가 쓰시던 것이다.

30년도 더 지난 오늘, 80년대에 쓰던 물건들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반갑기도 하고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기도 했다. 어린이 시절을 떠올리며 삼십 몇 년만에 먹을 갈아보았다. 그리고 벼루박물관에서 산 새 붓으로 서툴지만 몇 글자를 적어보았다. 잘 쓴 글씨는 물론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붓으로 쓴 글씨는 펜글씨가 따라갈 수 없는 우아함이 있었다. 앞으로 좀 써볼까 싶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 쓰던 일기장 십여 권을 이십대에 다 버리는 바람에 초딩 때의 흔적은 사진밖에 없다. 그 시절에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벼루를 보니 일기장 공책이 무척 아쉽고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 안에는 하나의 ‘나’가 아니라 한 살 때의 나, 두 살 때의 나, 열 살 때의 나, 스무 살 때의 나, 지나간 모든 ‘나’들이 살고 있다.

때로 우리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떠내려보낸 그 잃어버린 ‘나’들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중에 예전의 '나'도 있는 것이다. 그 그리움이 내게 붓글씨를 쓰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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