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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역전마을 인터뷰 1 - 40년 단골이 즐비한 가게

by 릴라~ 2020. 11. 30.

**10월부터 경산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지역 스토리텔링 부분에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총 11분을 인터뷰해서 글로 옮기는 작업인데 내가 쓴 글이라 기록으로 남겨둔다. 

 

 

40년 단골이 즐비한 가게, 박00씨

 

일당 100원 시절

 

경산역 앞 역전네거리 모퉁이에는 40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킨 가게가 있다. 1982년 문을 연 이발사 박00 씨의 가게, ‘국민이용소’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세월의 감촉이 느껴진다. 거울도 의자도 세면대도 오래되었지만 정갈하다. 한쪽 선반에 놓인 액자 하나가 눈에 띈다. 100원 짜리 지폐가 들어 있는 액자다. 1965년 4월 13일이라고 날짜도 쓰여 있다. 무슨 사연인가 여쭤보니, 이용사 자격증을 따고 받은 첫 일당이란다. 자격증을 따기 전에는 80원을 받다가 처음 100원을 받고 기쁜 마음에 기념으로 보관하셨다 한다. 자신의 직업과 삶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전해졌다. 화폐개혁 이후에 받은 일당이다.

 

벽면 한쪽으로는 감사패가 죽 걸려 있다. 40대, 본업만으로도 한창 바쁘실 때에 청소년 선도위원 등 활발하게 봉사활동을 하셨다 한다. 그동안 학생들 머리를 깎아주며 돈을 벌고 가게도 장만하셨기에 그들에게 뭔가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으셨단다. 법무부장관의 감사패도 보인다.

 

경산 멋쟁이는 다 왔죠

 

박00 씨가 이발 일을 시작한 건 열다섯 살 때다. 전쟁 직후라 다들 배를 곯던 시절이었다. 이발을 배우기 전, 식당 주방장을 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구 명덕네거리 근처 설렁탕집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기대와 달리 설렁탕 한 그릇도 먹기 힘들어서 다시 경산에 돌아왔을 때 박00 씨 앞에 나타난 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국민이용소였다. 3년 정도 기술을 배우고 꽤 잘한다고 생각할 무렵, 군대 갈 결심을 했다. 손님들이 박00 씨가 너무 어려 보인다며 머리를 잘 맡기지 않아서 나이 좀 먹고 와야겠다 싶었단다. 그런데 해군에 지원했더니 해군은 중졸 이상이라고 거절당했다.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중퇴한 것이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병무청을 다시 찾아갔다. 국가자격증이 있으면 학력이 인정되는 길이 있어서 이발병으로 해군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하고는 경산에서 종업원으로 이발 일을 했고, 처음 일을 배웠던 국민이용소가 문을 닫을 때 장비 일체를 물려받아 1975년부터 ‘국민이용소’ 간판을 내걸고 가게를 시작했다.

 

일이 잘 맞고 소질도 있으셨다 한다. 가게는 번창했다. 당시 경산 멋쟁이는 다 들락거리는 가게였다. 풍선에 비누칠해서 이발 연습을 하며 풍선을 숱하게 터뜨렸던 부지런한 소년이 어느새 종업원을 여섯 명이나 데리고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11년만에 땅을 사서 역전네거리에 집을 지었다. 도로가에 자신의 이발소와 부인의 미용실이 나란히 있고, 2층에 살림집을 올리는 건 박00 씨의 십대 때부터 꿈이자 평생 소원이었다. 대구 욱수동에서 태어난 박00 씨는 다섯 살 때 역전마을에 이사왔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슬레이트집 한 채에 네 가구가 세 들어 살았다. 새 가게는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섰다. 박00 씨가 서른 여덟 살 때 일이다.

 

박00 씨는 이 일을 정말 잘 배웠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경산 주민들 덕에 이만큼 자리잡았다 생각하면서 또 하나의 꿈이 생겼다. 다름 아닌 봉사다. 가족 건사하느라 바쁜 시기에도 열정 하나로 쫓아다녔다. 청소년 선도위원, 소방대원, 체육회 회장 등 안 거친 게 없다. 지금은 경로당 회장을 맡아 어르신들 모시고 재미있게 활동 중이다. 인터뷰 중에도 경로당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경산 사람이 되어 주이소

 

박00 씨가 이발사가 된 지 이제 60년이 지났다. 이분에겐 40년 단골이 수두룩하다. 여고생이 아기 엄마가 되고 소년이 경찰관이 되어 돌아와 인사하기도 하고 소소한 추억이 많다. 단골 고객들은 박00 씨에게 제발 일을 그만두지 말라고들 한다. 사장님 없으면 누구한테 머리를 맡기냐고. 나이 들었지만 솜씨만큼은 젊은 사람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있다. 특히 염색만큼은 경산 최고라고 자부한다. 염색약을 손님 머리 밑에 조금도 안 묻히고, 하얀 이발복에 한 방울도 튀기지 않고 편안하게 마무리하신다. 상하수도 없던 시절, 물을 일일이 길어 염색할 때부터 익힌 솜씨다.

 

지난 시절, 경산역과 역전마을의 모든 변화를 목격한 이도 박00 씨다. 한번은 시 관계자들에게 건의도 했단다. 경산역은 경산의 관문인데 깨진 보도블럭이 보여서 되겠냐고, 서울처럼 예쁘게 깔아달라고 했단다.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지금 경산역 부근의 인도는 붉은 빛깔의 단단한 길로 변했다. 아스콘을 쓰는 공정이 다른 공사와 달라서 공사 기간에 한숨도 못 잤지만 식혜 한 박스씩 인부들에게 돌리며 그렇게 흐뭇했다 한다. 비 와도 물도 안 고인다고 다른 분들도 참 좋아한단다. 더불어 사는데 필요한 건 이런 작은 섬세함이다.

 

이발사의 꿈을 키웠던 소년이 일흔 중반이 되는 동안 많은 이웃들이 고령으로 떠나고 타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특히 경산에 아파트가 많이 생기면서 인구가 많이 늘었다. 경산역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박00 씨에겐 작은 바람이 있다. 새로 이주한 아파트 입주민들이 경산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대구에서 아이들 공부 마치고 공기 좋은 경산에 오신 분들이 경산을 사랑하고 경산 식당에서 밥을 먹고 경산에서 머리도 자르고 이 지역에서 돈을 쓰며 경산사람으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산 사람이 되어 주이소” 한 마디가 큰 울림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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