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는 게 정말 어려울 때가 있다. 5년하고도 반 만에 아빠 전화번호를 폰에서 지웠다. 도저히 지울 수 없어 그냥 두었었다. 처음엔 가끔 이 번호를 눌러보았다. 없는 번호라고 뜨다가 한참 지나 이 번호는 결국 다른 누군가에게 갔다. 내가 전화번호 '즐겨찾기'에서 엄마를 누른다는 게 가끔 실수로 그 위의 아빠를 잘못 눌러서, 알지 못하는 그분이 전화를 받는 일이 생겼다. 몇 번 실수하고는 지워야겠다 마음먹었다. 마음 먹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 번호를 지웠다. 보지 못해도 한 번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톨릭 신자지만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여전히 어렵다. 다만 동 트기도 전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의 심정에 깊이 공감할 뿐.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시간에, 그 누구보다 빨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가장 먼저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슬피 울다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 부르고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마리아야”라고 부르는 장면이 참으로 애틋하다. 이들에겐 긴 말이 필요치 않았으리라.
성서 저자들은 이렇게 두 사람의 극적 재회로부터 예수님 부활 사건을 전한다. 예전에 책에서 어떤 철학자가 예수님 부활 사건을 자신은 신화적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생각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부활 이야기가 신화나 전설 같은 구전문학의 형성 과정을 밟아서 특정한 스토리로 정착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한데 제자들이 예수님 사후 바로 부활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 했다.
부활이 문학적 은유인지 역사적 사실인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우리 곁에 있던 한 사람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는 안타깝게도 그가 부재할 때 더 절절히 느끼게 된다는 걸 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것이 내게 총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함께 있을 때 알면 좋으련만, 다 알기가 어렵다. 마흔 넘긴 나이에 졸지에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신규 교사일 때 우리반에 보육원 아이가 있었는데 늘 안쓰럽게는 생각했으나 부모가 없다는 게 이렇게 아픈 거라는 건 헤아리지 못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재에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충격과 고통의 시간 뒤에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겐 부활이 예수님과의 자연스러운 재회로 그려지지만, 다른 제자들이 각자 어떻게 부활 사건을 겪었는지는 성서에 자세하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엠마오 이야기와 도마 이야기 정도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나름대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충격과 고통과 기쁨을 겪고 소화했고 그들이 무엇을 해야할지 알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 외할머니도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사실상 내가 가깝게 겪은 첫 번째 죽음이 아빠였다. 아빠 형제자매 7남매 중에서 막내인 아빠가 제일 먼저 돌아가셨다. 죽음을 겪어본 적 없어서 더 놀랐던 것 같다. 아직 나는 이 사건을 잘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을 흔히 자연의 섭리라 하지만 내가 겪은 죽음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속수무책인 ‘폭력’이었다. 나도 제자들처럼 이 사건이 지닌 의미를 알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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