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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기록/제주, 한라산

섶섬이 보이는 방 1 — 서귀포 이중섭 거주지

by 릴라~ 2022. 2. 11.

섶섬이 보이는 방 1
— 1.4평 화가의 방

바다가 내다보이는 서귀포 언덕 위 초가. 그 끄트머리에 붙은 방이라 부르기에도 뭣한 1.4평의 작은 고방. 화가 이중섭과 아내 마사코, 두 아이들이 일 년간 살부비며 살았던 방이다.

이 방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나희덕 시인의 시 덕분이다. 시인은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를 방문해서 처음엔 '관'처럼 작은 방에 충격을 느낀다. 하지만 여기서 이중섭 식구가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냈음을 떠올리고는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이겠구나 한다.

화가의 가족이 조개껍데기 같은 그 방에 깃든 건 6.25 때문이었다. 도쿄 유학 시절에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마사코가 먼 원산까지 이중섭을 찾아오면서 이어지고 둘은 1945년 그곳에서 결혼한다. 6. 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이들 가족은 원산에서 부산을 거쳐 제주까지 왔고, 이 작디작은 방 한 칸도 그들에겐 안전하고 소중한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방이 너무 좁아서" 그는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가졌을 거라고. 서귀포에서 보낸 일 년이 화가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그의 작품이 말해주고 있다. 그림 하나하나마다 그가 꿈꾸던 평화가 구현되어 있다. 복숭아는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고 전쟁의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바다와 섶섬은 초라한 초가집의 풍경에 품위를 더했고 아이들은 해질 때까지 게와 물고기와 함께 뛰놀았다.

그들 가족의 행복은 길지 못했다. 생활고로 이중섭의 아내와 아이들은 부산을 거쳐 결국 안전한 일본으로 떠났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이중섭은 단 한 번 선원증을 구해 일주일 일본을 다녀왔다 한다). 화가는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1956년,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오래전, 서귀포 이중섭 거주지 옆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에 들렀을 때 그의 그림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어제 목적 없는 산책길에 지나가게 된 그곳엔 마침 <이건희 컬렉션>이 전시중이었다. 서울 전시도 예약이 힘들어 못봤기 때문에 당연히 예약마감이겠지 했는데 담날 딱 한 자리 빈 걸 발견. 어느 귀인께서 갑자기 취소한 듯. 덕분에 제주를 떠나기 전 그 귀한 전시를 보게 되었다.

공항에서 충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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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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