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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이야기/여행 단상

서귀포 기당미술관

by 릴라~ 2022. 2. 13.

한 얘술가가 자기 정체성을 찾는데 얼마만의 시간이 걸릴까? 쉰에 고향 제주의 너른 품에 돌아온 화가가 평생의 고투 끝에 찾아낸 독창적인 제주의 빛깔을 만날 수 있는 곳, 기당미술관이다.

원래는 잘 몰랐다. 이중섭미술관을 보고 공항에 돌아갈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 주변 명소를 검색, 걸어서 20분 걸리는 곳이라 낙점되었다. 별 기대 없이 갔는데 상설전시가 대박. 변시지 화백을 통해 또다른 제주를 만났다.

일단 작품들이 강렬하다. ‘폭풍의 화가’란 별칭답게 제주의 자연을 그만의 필치로 묘사했다. 한라산, 성산일출봉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장소가 화가의 내면에서 새롭게 변주된다. 힘찬 붓터치는 고흐를 살짝 연상시키지만 작품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배경색은 다 황톳빛이고 태양과 바다, 초가집과 조랑말과 구부정한 남자가 그림마다 등장한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난 화가가 간직한 유년의 조각일까.

1926년생 변시지 화백은 여섯 살 때까지 제주에 살다가 오사카에 건너갔다. 스물셋에 일본 최고 공모전 ‘광풍회전’ 최고상을 최연소로 수상해 세상을 놀라게 하지만 서른한 살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이후 그는 작품에서 일본풍과 서구풍이 아닌 한국풍을 모색했으나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쉰에 서울을 떠나 제주에 완전히 정착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아열대의 햇살이 비치면 바다와 섬이 온통 서노랗게 보이는 데 착안해 황톳빛 제주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

화가의 제주화엔 하나같이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그 폭풍 속에 지팡이를 짚고 외롭게 서 있는 한 남자가 있고(화가는 소학교 때 씨름대회에서 다친 후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살았다) 제주의 초가와 조랑말이 있다. 거친 자연과 시대의 격랑, 인간의 고독과 울음이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가의 자화상이자 삶의 파고 앞에 비틀거리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 각자의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빠져드는 것 같다.

미술관 이름 ‘기당’은 재일교포 사업가 강구범 선생의 호라고 한다. 변시지 화백의 외사촌이자 서귀포 출신인 그는 이 미술관을 지어 제주시에 기증했다. 작은 미술관이지만 자연광을 살린 편안하고 아늑한 실내 공간이 멋이 있다. 미술관 앞에서 보는 한라산 전망은 더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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