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작은문학관
청송군 현서면 가는 길은 잊고 있던 고향을 찾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어요. 대구토박이인 제게 청송은 무관한 곳인데도. 수성IC를 통과해 경산 지나고 천문대가 있는 영천 보현산 자락을 넘으면서 먼 길을 돌아 고향에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 살짝 들었습니다.
청송 현서면 화목리는 이오덕 선생의 고향 마을이에요. 초등 교사, 아동문학가, 우리말 연구가로 숱한 업적을 남기고 백 권 넘는 책을 저술한 분. 대학 때 '우리글 바로쓰기'를 읽으며 그분의 지극한 우리말 사랑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지요. 그땐 그분의 교육사상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대학원에서 학부 전공 대신에 교육학을 택하는 바람에 온갖 서양 철학자, 교육 이론가들 사이를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이 헤매고 다닌 시절이 있었습니다. 10년을 서양 이론들 사이를 끌려다닌 끝에 결국 잘 모르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해 머리 쥐어뜯으며 논문을 썼지요. 그 과정이 다 끝나고 제겐 우리말에 대해 향수 비슷한 감정이 찾아왔어요. 이상한 번역투 문장,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현학적이고 의미가 꼬인 문장들에 넘 오랫동안 질려있었던 거죠.
제대로 된 한 문장, 꾸미지 않고, 정확하게 의미가 가슴에 파고드는 문장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제게 나타난 분들이 권정생과 이오덕 두 분입니다. '몽실언니'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따라가며 이토록 쉽고 아름답고 품격 있는 우리말 문장에 감격하고, 본질을 간명하게 꿰뚫는 이오덕 선생의 교육사상에 무릎을 쳤지요.
이오덕 선생은 사람다운 생각과 사람다운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 했어요. 이를 위해선 일과 가난과 자연이 필요하다고. 교육의 모든 재료는 살아있는 삶에서 끌어와야 하며, 자기 입에 붙은 말로 정직하고 당당하게 자기를 표현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이 땅의 민주주의 또한 남의 말과 글이 아니라 우리말로 창조하는 것이라고.
글쓰기 교육에 한 획을 그었고, 겨레의 스승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 그분을 기념하는 '이오덕 작은문학관'이 이제야 고향 청송에 세워졌어요. 1925년생. 윤동주 시인보다 일곱 해 늦게 태어나 스물에 해방을 맞이한 청년. 식민지와 이후 시대를 모두 경험한 분. 그래서 누구보다 민족적 정체성이 뚜렷했고, 글을 읽노라면 이 세대 분들의 주인의식과 비판 정신을 따라가기란 어렵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식민지교육으로 맛이 간 분들은 제외하고).
문학관은 그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방 한 칸짜리 작은 공간이에요. 이 마을에서 평생 살았고 문학관 추진위원장을 맡았던 마을 어르신 말씀으로는, 농림축산부 공모전 당선금 5억으로 추진한 사업이라 돈 만큼만 공간을 꾸밀 수 있었다 해요. 문학관 개관 이후 예산이 더 생겨서 이제야 주변 정리에 들어갔다고. 국내를 다녀보면 우리가 가진 문화적 자산에 대한 인식이 야박하여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문학관 바로 근처에 이오덕 선생의 생가가 있습니다. 지금은 타인이 살고 있어 문앞까지만 가봤어요. 몽실언니가 그려진 집이에요. '몽실언니'를 쓴 권정생 선생의 외가가 이오덕 문학관 바로 옆마을 댓골이라 해요. 권정생 선생도 어릴 때 외가가 있는 청송에 잠깐 사셨으니 이오덕 선생과의 인연이 남다릅니다. 한참 뒤에 권정생 선생의 동화에 반한 이오덕 선생이 권정생 선생을 찾아가면서 두 분은 30년 넘게 편지를 주고 받지요.
현서면의 또다른 위인으로는 독립운동가 박치환 선생이 있습니다. 만주, 러시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24년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가져온 국광 10주가 청송사과의 효시가 되었다 해요. 현서면 일대는 온통 사과밭입니다.
담주부터 이오덕 선생의 '꿩'을 수업할 예정이라 딱 맞는 시기에 그분의 고향을 다녀왔어요. 우리말과 글을 다루는 모든 이들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시는 분. 이분의 높고 귀한 가르침이 '소설'이란 장르를 통해 열네 살짜리들한테도 쉽게 전달된다는 것이 문학의 매력이겠지요.
#현서면 장터 앞 개나리분식 도시락 괜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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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이오덕 작은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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