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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문지방을 밟는 여행
히말라야, 아무 것도 살지 않는, 바위를 덮은 만년설 밖에 없는 하얀 고봉들이 그처럼 인간을 매혹시키는 까닭이 무엇일까. 네팔에 다녀온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건만, 설산 사진만 보면 가슴이 뛰고 다시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해발 5000미터 가까이서 며칠 지낼 때 드는 느낌을 저자들은 '저승 문지방을 밟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그곳에 갔다 돌아오면 세속의 모든 것이 좀 더 아름답고 생생하게 느껴지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고. 그 느낌에 중독되면 히말라야를 자꾸 찾게 된다고.
내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갔을 때 그런 느낌이었다. 산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해발 고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세속으로부터 아주 먼 곳에 도착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더욱 그렇다. 4000미터에서 보낸 하룻밤은 그저 광활한 대자연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어떤 경계 지점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내가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를 압도한다. 그래서 히말라야 고봉들은 신처럼 느껴진다. 신이 우리를 굽어보는 느낌. 그것은 어쩌면 자연과의 일체감이겠지만, 히말라야의 자연은 인간을 초월하고 세속을 초월한 광막한 우주이다. 죽음조차 그 우주의 자연스러운 일부처럼 다가오는.
그렇게 히말라야에서는 누구나 우리를 바라보는 산의 눈길을 느낄 수 있다. 아무 규정도 없는 산의 그 순수한 눈길은 사회의 온갖 관계속에 훼손된 우리의 존재성을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 머릿속은 맑게 비워지고 상념이 끊어지고 우리는 현재에,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심장은 가빠지고 우리는 우리 몸과 가까워지고, 영혼과 가까워진다. 대지와 연결되고 하늘과 연결된다. 그래서 히말라야는 신의 땅이다.
이 책은 쿰부 순례와 안나푸르나 라운딩의 기록이다. 저자들은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쿰부 순례라고 부른다. 가파른 등산로를 즐기는 트레킹이 아니라 네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설산을 가까이 만나러가는 긴 여정이기 때문에. 시인 김홍성이 쿰부 순례를, 아내 정명경이 안나푸르나 라운딩 부분을 썼다. 아무 꾸밈과 과장 없이 순례의 과정을 담백하게 써내려가고 있어서 히말라야 트레킹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안타까운 점은 아내 정명경이 39세의 나이로 일찍 타계했다는 것.)
표지 그림이 이들과 함께 쿰부 순례를 한 강찬모 화백의 그림인데, 책 중간에 그의 그림이 여럿 나온다. 한밤중에 히말라야 설산을 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그림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밤 검푸른 하늘 아래로 빛나는 설산, 그 위로 번쩍이는 별들, 그 아래서 한 인간이 느끼는 고독이 깃든 충만감. 어떻게 한 장의 그림 속에 그 절묘한 느낌을 이렇게 담아낼 수 있는지. 그림을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 다시 히말라야 어느 롯지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을 생생하게 복원시켜 주는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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