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덴마크의 한 의사가 있다. 병원의 새 진료 기록 프로그램 도입으로 환자를 만날 때 자그마치 142개의 설문에 답을 해야 한다. 답을 입력하지 않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최근에는 손 씻기 과정 연수까지 받았다. 30년간 외과의사로 일해서 손을 제대로 안 씼었다면 자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가 자조적으로 말한다.
현대에 들어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은 점점 고역이 되고 있다. 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이해하기 힘든, 어떨 때는 그저 눈에 보이는 과시용에 불과한 온갖 엑셀 표와 서류상에만 의미 있는 보고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난 학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웬걸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심지어 대학 교수들까지. 저자는 이 모든 것을 '가짜 노동'이라 이름 짓는다. 그리고 사무직 노동자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가짜 노동이 어떻게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왔는지 풍부한 사례와 함께 고찰한다.
1930년대, 그리고 1960~70년대엔 많은 학자들이 미래엔 모든 이가 주당 15시간만 일하는 사회가 되리라 예언했단다. 하지만 2023년 지금,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일하고, 번 아웃이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왜 그 밝은 미래는 도래하지 않은 걸까. 온갖 불필요한 프로젝트와 보고 등 가짜노동이 우리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흔히들 민간 부분은 경쟁력이 있고 업무가 효율적인 반면 공공 부분은 방만하고 관료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민간 부분이나 기업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어디서건 불필요한 각종 회의와 프로젝트, 현장 조사 등 일하는 '척' 하는 행위들로 가득하다. 임금을 시간당 계산하는 것도 가짜노동에 기여하는데 누군가 세 시간 걸릴 일을 한 시간만에 한다면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짜노동에서 벗어나라고 외친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적게 일하게 될 것이고 생활에 필요한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결국 사회는 기본소득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20세기 초중반에 인류가 꿈꾸던 적게 일하는 사회, 희망찬 미래는 오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개인은 끊임없는 경쟁과 자기 착취, 번아웃에 시달리도록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일을 '하는 척' 하는데 생의 중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그 결과 일에서 보람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다는 걸.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요즘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이다. 은퇴 후 임금노동 시장에서 벗어났을 때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점에서도 많은 화두를 남기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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