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목숨을 걸어야만 획득할 수 있다. (...)
물론 자기 목숨을 걸지 않는 개인도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게 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인간'이라는 진실을 독립된 자아의식으로 획득하지 못한다.' (헤겔)
활자를 따라가는 게 힘들었다. 그동안 너무 부드러운 것만 읽었고, 그리고 속독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 읽으면서 끊임 없이 게을러지려 하는, 대강 건너 뛰려하는 나를 보았다. 다시 읽는데도 왜 이리 새로운지.
억눌린자를 위한 교육. 한 인간이 세계를 명명할 권리를 잃었을 때, 그는 '인간답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이리에게 삶의 목표, 교육의 목표는 인간 해방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인간화와 비인간화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오직 인간화만이 인간의 사명이라고 그는 믿는다.
문제는 억누르는자들의 폭력이 인간이 되려는 억눌린자들의 사명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억눌린자들은 무지와 무기력과 같은 '침묵의 문화'에 함몰되어 자신과 세계를 변혁하려는 힘을 잃고 있고 기존의 모든 교육 제도가 그 침묵의 문화를 영속하는데 기여한다.
억눌린자들에겐 자유에 대한 공포와 자학이 깊이 박혀 있다. 억누르는자의 가치가 내면화된 그는 자신이 온전한 인간이 되려고 시도할 때도 종종 그 자신 억누르는 자와 똑같이 변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박정희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유에 대한 공포'를 확인한다. 자기 존재를 긍정하지 못하는 그들은 독재자의 왜곡된 이미지를 숭상하는 것이다. 대통령을 향해 '대학을 못 나와 무식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들에게서 또한 자신에 대한 부정과 뿌리 깊은 자학을 확인한다. 식민지와 군사 독재의 경험이 사람들의 사고를 비틀어놓은 결과이다.
그 해결책으로 프레이리는 은행예금식 교육이 아닌 문제제기식 교육을 제시한다. 문제제기식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이고, 인간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길은 의사소통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명령하고 길들이는 교사의 역할을 제거하고 배움의 과정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함께 탐구하는 과정으로서의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대화 말이다.
이러한 실존적 대화 속에서 학생들은 점차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자신들이 도전받고 있다는 사실과 그 도전에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도전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새로운 도전을 낳고 그것은 또 새로운 이해를 낳고 그리하여 학생들은 점차 스스로를 투신한 자로 여기게 된다. 그들은 소외되지 않고 <세계와의 관계 속의 인간>이 된다.
지식을 채워넣는 은행예금식 교육은 삶을 부분으로 갈가리 찢어놓고 전체로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과 동떨어진 세계, 추상화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생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내가 받은 중고등학교 6년의 입시 교육은 내가 나의 '말'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내 내면은 실어증에 걸려 있었다. 그것을 극복하는데 꼬박 대학 4년이 소요되었다. 졸업할 무렵에서야 다시 '언어'가 내게로 왔다. 언어와 함께 비로소 '세계' 속에, 통째로 된 진짜 '현실'과 더불어 존재할 수 있었다.
프레이리건 듀이건 브루너건 그 누구가 되었건 결국 하는 말은 동일하다. 교육은 삶을 전체로 인식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임 1.
'의식과 세계는 동시에 부여된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의식의 외부이므로 의식과 세계는 서로 상대적이다.' (사르트르)의식을 소유하지 말고 의식하며 존재할 것.
2.
프레이리가 언급한, 대화에서 중요한 몇 가지.
사랑과 겸손, 믿음을 바탕으로 한 수평 관계. 사랑이 없으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행위로서의 대화가 존재할 수 없으며 대화자들 사이에 겸손이 없으면 대화가 결렬되며 나아가 대화는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인간 사명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처사는 결코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또한 대화는 희망과 비판적 사고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화에 참여하는 자들이 자기네 노력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면 그들의 만남은 공허하고 지루한 것이 될 것이다. 비판적 사고는 역사와 시간을 과거의 체험으로 보지 않고 현세에 깊이 파고 들어 현실을 끊임 없이 변혁하기 위한 것.
3.
프레이리는 역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임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극우파는 현재를 길들여 그가 바라는 미래가 이 길들여진 현재를 재생하기를 원하고, 극좌파는 미래는 예정된, 필연적인 숙명으로 생각하므로 둘 다 결정론자이고 둘 다 틀렸다.
내일은 결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4.
그에게 있어 절망이란 인간이 지닌 한계상황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역사적 순간에 인간이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계 상황이란 통과할 수 없는 경계가 아니고 모든 가능성들이 시작되는 진정한 경계이다.' (비에이라 삔또)
'자유란 정복하여 획득하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부단히 그리고 참을성 있게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유란 인간의 외부에 자리잡은 이상이 아니고 신화가 되어가는 이념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완성에 요구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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