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움직이지 않는 여행 - 욱수골에서

by 릴라~ 2009. 8. 11.



에서 한 달쯤 생활하면 어떨까. 외로울까. 사람이 그리울까. 어떤 낯선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까. 무엇을 더 강렬하게 느끼고 무엇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까. 숲 가운데 정자에 앉아 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다가오는 어느 방학 때쯤 한번 떠나볼까 싶다. 지리산 자락 아래도 좋고, 강원도 좋고, 네팔 산자락이나 동남아의 작은 해변 마을도 좋을 것 같다. 최근 필리핀 팔라완의 포트바튼이라는 곳이 마음에 다가오고 있다. 먼 거리를 주파하는 여행도 좋지만, 요즘은 한 곳에 머무는 여행, 그런 것에 끌린다. 
작년 봄, 함양에 갔을 때다. 버스 타고 가는데,

캠핑카 하나가 옆으로 지나갔다. 기사님이 그걸 가리키면서 외국애들 셋이 지난 겨울에 함양에 내려와서 세 달째 죽치고 논다고 했다. 경치 좋은 곳에 차를 세워놓고 늘상 기타 치고 그런단다. 쟤들은 대체 씻지를 않는다고 산발한 머리를 보면 얼마나 지저분한지 모른다고 평을 늘어놓으셨다.

속으로 제대로 놀 줄 아는 사람들이구나 했다. 한국 땅에 놀러와서 지리산 자락 아래에서 세 달이나 머문다니, 얼마나 멋진가. 나는 우리 땅이지만 그만큼 느리게 다니진 못했다. 나 바깥의 소리, 땅의 소리가 나를 감염시킬 때까지 그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물러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 땅의 정수를 맛보고 갔으리라.

느리게 여행할수록 다름을  깊이 체험한다. 자가용보다는 로컬 버스가, 버스 보다는 자전거가, 자전거보다는 도보여행이 그래서 여행의 진수다. 여행자의 시선은 언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과 좀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그 땅이 지닌 '다름' 속에 풍덩 몸을 적시다보면, 그 모든 다름들을 가능케 하는 지반, 우리 모두 이 지구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동반자라는 보편적 지평에 다다르게 된다.

꼭 자연이 아니라도 좋다. 뉴욕 같은 도시도 매력적이다. 중요한 건 일상과 우리가 만나는 곳 사이에 놓인 차이다. 도시는 도시대로, 오지는 오지대로의 멋과 낭만이 있다. 별 다섯 개 호텔 여행과 소박한 게스트하우스 혹은 캠핑, 나는 둘 다 좋아한다. 물론 좀 더 좋아하는 건 후자다. 내가 답답한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소박함, 자연, 이런 것에 더 끌리는 것일 게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핵심은 두 항 '사이'에 있다. 바쁘고 치열한 삶과 느리고 여유로운 삶, 우리는 그 둘 다를 필요로 한다.

전날 걸었던 길을 반대로 걸었다. 초입부터 오르막길이어서 같은 길이지만 시간이 더 걸렸다. 능선을 넘기 싫어서 중간에 샛길로 빠졌는데, 인적 없는 으시시한 숲으로 접어들었다. 다시 나오려니 너무 멀어보여 지름길을 찾다가 한 무리의 무덤을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한 숲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무서워할 것 하나 없는데도. 길이 틀렸으면 다시 올라가면 되고, 내려가더라도 인근 마을에 닿는 것이 뻔한데, 대체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다시 능선길을 찾았을 때 두근거리던 심장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밝음 속에서 걸으면서 아무래도 우리 눈은 어둠에 익숙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오감이 밝음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 겁이 났던 모양이다. 죽은 자가 우리를 헤칠 리가 없는데도 무덤을 보고 덜컥 겁이 난 까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겠지. 예쁜 길, 호젓한 길, 아늑한 길, 정다운 길, 지루한 길, 섬뜩한 길을 걷는 동안 금세 하루가 갔다.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