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부두르 사원에 간 건 2002년 한 달 동안 인니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인근 숲에 자리한 사원의 아름다움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거대하기도 했지만, 정사각형으로 생긴 사원의 벽면을 따라 걸으면서 한 층이 끝날 때마다 또다른 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 구조가 특이했다.
다 도는데 꽤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벽면 전체에 부조가 되어 있어 그 그림들을 따라 한 층 한 층 올라가는데, 마지막 층에 도착하면 원형 불탑만 있을 뿐 어떤 형상도 없다. 이는 열반, 곧 니르바나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 원형불탑의 아름다움은 상상을 넘어선다. 긴 계단을 한 시간 이상 걸은 끝에 도착한 니르바나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맑고 투명해짐을 느끼게 된다.
내 기억에 보로부두르는 총 9층이며, 이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맨 아래는 세속의 세계, 중간은 부처의 생애, 마지막 단계는 니르바나로서 형상 대신에 원형 불탑 속에 부처가 숨겨져 있다. 형상 없는 '공'의 세계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걸작이다. 눈길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면 오직 푸른 숲과 하늘만 드넓게 펼쳐져 있어, 보로부두르는 마치 천국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시작되는 곳 같다.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릴 것 같다고 할까.
한 층 한 층 올라가며 많은 부처상들을 만났다. 개인적으로 보로부두르의 붓다 얼굴을 좋아한다. 우리 나라 불상보다 덜 엄격하고 좀 더 선이 매끈한 얼굴에 미소도 더 온화하고 청순하다. 청년 같은 얼굴의 부처님이랄까. 돌이켜보면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보로부두르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는 듯.
최근 들어 보로부두르가 문득 마음에 떠오르곤 했다. 그 사원의 9층 구조가 인간 의식의 어떤 단계를 상징하는 것 같아서. 탐진치에 휘둘려 지옥에 사는 삶에서 중생을 돕는 부처의 삶으로, 그리고 니르바나에 이어지는 의식의 단계. 이 세 단계는 한 사람의 삶 속에, 심지어는 하루 속에 모두 들어 있는 것 같다. 최근 한 달 동안 몹시 힘들었다. 학교 일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고, 그 하나가 다른 데로 번져서 다른 모든 것에도 의미를 잃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이게 지옥이구나,,, 내 의식 수준이 바닥으로 떨어졌구나,,,,, 그리고 그것 또한 나의 선택이라는 인식이 뒤따라왔다. 그 상태에 머물며 쉬이 일어나지 않은 건 나였으니까.
보로부두르는 말해주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세상의 모습을. 그 끝에는 온 세상을 포용하는 붓다의 형상 없는 미소가 자리하고 있다. 세상에 압도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상을 거부하지도 않는 흔들림 없는 단정한 자세, 깨달은 자의 고요한 미소.지난 한 달 간 다양한 종류의 지옥을 경험했던 것 같다. 올해 시작할 때의 목표가 everyday meditation이었는데, 한 두 달 하다가 때려치우고 하다 말다 하다가 가을 들어 아예 접었더니, 그 결과는 의식의 끝없는 추락이다. 그 시작은 외부 세계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 사건을 그토록 오래 곱씹은 것이 나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든 셈이다.
이 세상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듯이, 한 사람의 내면에도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존재한다. 마음을 그냥 버려두면 마음은 쉽게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기억 속을 헤매고 환영 속을 떠돌아다닌다. 그래서 우리는 신을 찾고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리라. 우리 의식의 레벨을 높이기 위해서, 그와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우리에게 온다.
보로부두르의 계단을 하나하나 다시 오르고 싶은 날이다.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는 그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경이었는데, 다시 간다면 더 의미가 깊을 것 같다. 인터넷에서 찾은 보로부두르의 사진을 보며 잠시 이 세상 속 천국을 느낀다. 이 세상을 향한 붓다의 잔잔한 미소로부터.
2002/1 여행
((아래는 두산백과사전에서 찾은 박진호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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