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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월든 (소로) &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박홍규)

by 릴라~ 2010. 11. 16.

월든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레,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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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헨리데이비드소로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지은이 박홍규 (필맥,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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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기말고사에 졸업여행까지 다녀왔고, 교과서도 다 끝냈고,  남은 한 달 반 동안 대체 뭘 할까 하다가 어짜피 애들이 잘 안 들을테니 올해 남은 날들 동안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맘껏 해보자 싶었다. 영감을 주는 인물들과 그의 글을 한 시간에 한 명씩 소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이가 헨리 데이빗 소로였다. 자기가 살고 있던 19세기를 마땅찮아 했던, 당대의 모든 속박-물질문명, 기계노동, 자연파괴, 노예제도, 불합리한 사회제도-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살았던 자유인.

아주 오랜만에 월든을 새로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에서 이처럼 큰 기쁨을 느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이 좋은 친구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구나 했다. 그냥 친구가 아니라 영혼을 채워주는 친구, 마음속 오랜 그리움을 속속들이 채워주는 친구... 다시 생을 축하할 수 있을 것 같은, 삶을 마구마구 살고 싶어지는 그런 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월든은 다소 지루한 책이겠지만, 월든에 담겨 있는 소로의 독특한 실천과 사색, 번쩍이는 영감이 이 책을 그 무엇보다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었다.

소로는 선배들로부터 배운 것이 없다고,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라고 글을 시작한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30여 년을 살아왔으나 아직까지 선배들로부터 유익한 가르침이나 진심에서 우러난 충고 한 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으며 아마 해주려 해도 해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소로는 그가 본 것들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농장에 얽매어 자유를 상실한 농부, 기계적인 노동에 시달리며 인간다운 삶에서 멀어진 노동자 등 문명 사회의 비참함을 낱낱이 관찰했고, 인간이 그와는 다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인생의 변화와 즐거움을 다 소진시키고도 남을 권태와 싫증은 분명 아담 시대부터 있어 온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간의 능력은 한 번도 제대로 측정된 적이 없다. 과거에 해놓은 일만을 가지고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없고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인간이 시도해본 것은 너무나도 적기 때문이다.

그는 선배들의 전철을 따르지 않고, 그 스스로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새로이, 살아보고자 했다. 물질문명을 거부한 소박한 삶.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월든 숲에서의 생활이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나는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게 스파르타인처럼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엎어 버리기를 원했다. 수풀을 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압축시켜서 그 결과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고,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으로 밝혀지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이 악마의 것인지 또는 신의 것인지 이상하게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이 사는 주요 목적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야생의 월든 숲에서 소로는 스스로 집을 짓고, 일주일에 하루를 노동하고, 하루에 4시간 이상 걸으면서 생활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많은 돈이 들지 않았고, 지극히 정신적이고 풍요로운 삶이 가능함을 증명해냈다. 

요컨대 나는 신념과 경험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소박하고 현명하게 생활한다면 이 세상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그의 삶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은둔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하루 걸러 마을을 다녀가면서 세상을 늘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숲속 생활도 2년밖에 되지 않는다. 소로는 실험이 2년으로 충분했다고 말하고 있다.

'월든'은 그 실험의 보고서이다. 그가 그곳에서 관찰하고 사색한 것들, 숲의 소리들, 고독, 방문객들, 호수, 동물들, 불때기, 계절의 변화 등에 대한 아주 충실한 보고서. 내가 특히 인상적으로 읽은 대목은 그가 하루의 삶을 열면서 느낀 것들이다. 소로는 문명 생활이란 이리저리 방향 없이 휩쓸리다 삶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보고 사람들이 하루를 '자연'처럼 의도적으로 보낼 것을 제안한다. 아침은 모든 이의 천재성이 깨어나는 시간이며 단호한 마음으로 아침부터 낮까지를 보낼 수 있다면 저녁에 깊은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루 중 가장 기억할 만한 때인 아침은 잠이 깨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각에 우리는 잠이 제일 적다. 우리 몸 안의 어떤 부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잠만 자는 어떤 부분이 적어도 이때의 한 시간 동안은 깨어 있다. 어느 하인이 기계적으로 흔들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천재성에 의해 깨고, 공장의 종소리 대신 천상의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새롭게 얻은 힘과 우리 내부의 열망에 의해 깰 때만 전날보다 더 고귀한 삶은 시작될 수 있으며, 어둠은 그 열매를 맺고 빛에 못지않게 소중한 것임을 입증하게 된다. 그렇지 못한 날은 그것을 하루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별로 기대해 볼 일은 없는 날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그가 이때까지 더럽힌 시간보다 더 이르고, 더 성스러운 새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인생에 이미 절망한 사람이며 어두워져 가는 내리막길을 걷는 사람이다.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탄력 있고 힘찬 생각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언제까지나 아침이다.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든,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일이 어떻든 상관없다. 아침은 내가 깨어 있고, 내 속에 새벽이 있는 때이다.

하루를 자연처럼 의도적으로 보내보자. 그리하여 호두껍질이나 모기날개 따위가 선로 위에 떨어진다고 해서 그때마다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하든 또는 거르든, 아침에는 차분하게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자. 손님이 오든 또는 가든, 종이 울리든, 아이들이 울든, 단호하게 하루를 보내도록 하자. 왜 우리가 무너져 내려 물결에 떠내려가야 하는가? 정오의 얕은 모래톱에 자리잡은 점심이라는 이름의 저 무서운 격류와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자. 이 위험을 이겨내면 당신은 안전한 데로 들어서게 된다. 나머지는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월든 숲에서 혼자 살면서 느끼는 고독에 대해 묘사한 부분도 아름다웠다. 자유에는 외로움이 따르기 마련인데 소로의 외로움 속에는 고뇌의 흔적이 없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이 스스로 자기 세계를 이룩하고 있는 것처럼 외로웠고, 또한 자연의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친화감을 느꼈다. 그의 아름답고 강인한 내면이 느껴지는 글귀이다.

대체로 내가 사는 곳은 대초원만큼이나 적적하다. 여기는 뉴잉글랜드이면서도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나는 혼자만의 해와 달과 별들을 가지고 있으며 혼자만의 작은 세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자연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감각 기능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사람의 귀에는 어떤 폭풍우도 ‘바람의 신’의 음악으로 들릴 뿐이다. 소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을 속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계절을 벗삼아 그 우정을 즐기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러운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속에, 또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너무나도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적인 감정이었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박홍규 선생의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소로의 생애와 사상을 개괄한 책인데, 얇지만 너무 좋은 책이다. 선생은 한국에서 소로가 자연주의자로 오해되고 있다고 본다. 소로는 자연을 중시했지만 인간과 사회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고 고전을 즐겨 읽었다 한다. 선생은 소로가 오늘날 웰빙처럼 살기 좋은 자연에서 별장 짓고 호의호식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을 거부하고 야생의 황무지로 걸어들어가  스스로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삶의 탐험가임을 밝혀낸다. 

하버드를 졸업했지만 평생 변변한 직장 하나 없이 제 멋대로 산 비정규직, 노예제도는 물론 모든 권위와 집단의 통념에 대항해 개인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아나키스트, 소박한 생활로 자연의 진리에 다가가려 한 진정한 자유인이었다는 것이다. 평화를 사랑했으나 비폭력주의자는 아니었고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소로를 한국에서 수도승과 가까운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선생은 소로의 월든 숲 생활을 은둔/웰빙이 아닌 '자기 탐구의 여행'으로 보고 있다. '월든'은 이러한 소로의 반항적인 생애 전체를 배경으로 했을 때 그 의미가 더욱 탄탄하게 살아난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이 소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하는데, 이 때의 간디는 인도의 독립 투사가 아니고 이 때의 킹 목사는 위대한 비폭력주의 인권운동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물질 문명을 거부했던 그 간디와 킹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단지 나일강과 니제르강과 미시시피강의 수원이거나 미국 대륙의 서북 항로란 말인가? 차라리 당신 내부에 있는 강과 대양을 탐색하라. 당신 내부에 있는 보다 위도가 높은 지역을 탐험하도록 하라. ... 진실로 바라건대 당신 내부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라.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라. 각자는 하나의 왕국의 주인이며, 그에 비하면 러시아 황제의 대제국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 얼음에 의해 남겨진 풀더미에 불과하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이렇게 고상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소로는 월든을 끝맺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소리에 따라 자유롭게 살면서 자기 길을 걸어갈 때, 더 이상 고독도 고독이 아니고, 빈곤도 빈곤이 아니며, 연약함도 연약함이 아니라고. 우주의 법칙이 명료해지고 그 무엇도 그대를 가로막을 것이 없다고. 세상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홀로 월든 숲으로 씩씩하게 걸어들어가는 소로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내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남은 문장이다.

사람이 자기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된다. 그때 그는 과거를 뒤로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을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변과 내부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 그가 자신의 생활을 소박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이제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빈곤도 빈곤이 아니며 연약함도 연약함이 아닐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중에 누각을 쌓았더라도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누각은 원래 공중에 있어야 하니까. 이제 그 밑에 토대만 쌓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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