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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 잠시 잠깐 알래스카의 바람 속에, 공기 속에, 얼어붙은 대지와 바다, 피고 지는 야생의 꽃들 사이에 머문 것 같다. 글도 사진도 훌륭하다. 자신이 속한 세계와 생생하게 대면하며 산 사람의 글은 항상 이처럼 간결하다. 간결하면서도 그 속에 그 자신과 그가 만난 세계의 혼이 깃들어 있다.
고기는 마을 사람 모두에게 분배되었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턱뼈만 얼음 위에 남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턱뼈 주위에 모여서 매김소리와 함께 바다를 향해 그것을 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턱뼈를 바다로 돌려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얼음산 저편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은 이미 얼음 위에 사물의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턱뼈가 얼음을 떠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내년에 또 오너라." 그 순간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에스키모는 그 턱뼈에 고래의 영혼을 실어보낸 것이다. 길었던 고래잡이가 마침내 이렇게 끝났다.(pp80)
에스키모가 고래의 턱뼈를 바다로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 턱뼈에 고래의 영혼을 실어보냈다는 단순한 내용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이 지닌 자연과 인간의 신비롭고 완전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가장 크게 잃은 것은 그러한 종류의 관계인 것 같다. 삶의 매 순간을, 우리들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를 의미 있고 충만하게 해주는 자연과의 깊은 관계, 나와 이 세계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무엇.
예전에 에스키모 생활의 중심에는 카리부(순록)가 있었고 카리부가 전부였어. 에스키모는 철따라 카리부를 뒤쫒았지. 사람들은 카리부와 함께 하면서 정신적인 충만을 얻었어. 거기에는 완성된 생활이 있었던 거야. 그러나 언젠가부터 서양 문명과 함께 화폐경제가 들어와 사람과 카리부의 관계가 약해지고, 사람들은 정신적인 충족을 점차 새로운 가치관에서 찾게 되었지. 하지만 그 새로운 가치관이란 것이 카리부하고는 달라서 아무리 쫒아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완성된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가버렸지.(pp29)
현대 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이들 에스키모인들이 과거 느꼈던 것과 같은 정신적인 충만감을 주지는 못할 것 같다. 알래스카의 자연에 반해 이십 여년간 그곳에 살면서 야생 동물과 토착민들의 삶을 기록해 온 저자의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이 또렷해졌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도 자연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라는 것을.
그 어떤 오락도, 스포츠도, 여가도, 문화, 예술도 자연의 리듬과 함께 하는 삶 만큼의 충실성을 우리에게 주지는 못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박물관, 공예품, 갖가지 공연 예술과 야외 스포츠, 음악회 등을 다 좋아하고 즐기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더 크게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언제나 광활한 대자연, 그 속에서 느끼는 침묵, 외로움, 충만함, 따스함이다.
저자의 꾸밈 없이 맑은 문장 속에, 그리고 비범한 사진 속에 알래스카의 바람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알래스카가 미국 문화에 편입되면서 겪은 슬픈 변화도 가감없이 기록되었다. 그의 글과 사진은 알래스카 토착민들과 야생 동물의 삶에 대한 마지막 증언이기도 하다. 그는 죽음조차 자연을 닮았다. 캄차카에서 촬영을 하다가 불곰의 습격으로 43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달려가지만,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었던 그 무엇이 아닐까. 새로운 것을 찾기 전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우선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책장을 덮으며 드는 생각이다.
여행을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그 지방의 풍경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과 같아서, 풍경은 결코 나와 참된 언어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런 여행은, 하면 할수록 세계가 그저 좁아지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그를 좋아하게 되면 풍경은 비로소 폭과 깊이를 띠게 된다. (p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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