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며, 세상에 좋은 책이 이렇게 많다니, 다시금 행복했다. 자신의 독서 체험을 담은 책이 요새 꽤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단연 최고다(타인의 독서에 관심이 없어서 그리 많이 보진 못했으나). 저자에 대한 개인적 호감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렇다.
MB 치하, 시절은 어둡고 갈 길은 멀다. 저자는 길을 잃은 지금, 자신을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끌어왔던 삶의 ‘지도’가 과연 옳았는지, 그것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청춘에 그를 사로잡았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리고 다시 확인한다. 지도들은 옳았으며, 더 많은 것들이 새롭게 의미가 밝혀짐을. 그리고 자신에게 다짐한다. 길은 계속된다고.
나 역시 이런 경험이 있다. 다만 나의 고민의 크기와 깊이가 저자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얇은 것이었으나. 서른을 넘으면서부터 조금씩 의심이 시작된 것 같다. 지금껏 내가 진리라 여겨온 것들이 과연 맞는 것인지를. 내 삶의 지도와 나침반이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보니 그 무렵부터 블로그를 시작했고 조금씩 끄적거리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저자처럼 내 삶을 이끌어온 지도책들을 다시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과거의 사건들을 돌아보긴 했으나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와 미래의 윤곽을 그려주진 못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책들을 다시 읽어보고 거기서부터 길을 찾으면 좋을 것 같다. 아니, 나의 '청춘'은 저자의 '청춘'과 많이 달랐다. 그 시절, 저자만큼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읽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삶을 돌아보는 것이 내겐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유시민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게 된 계기는 대학 때 읽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서다. 그 때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무슨 사건으로 제적되어 졸업을 못한-가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후 백분토론 사회자로 텔레비전에 나온 모습,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바닥이었을 때 절필을 선언하고 제 한 몸을 다 바쳐 돕는 모습, 개혁당 창당 등을 보게 되었고, 이 사람 참 멋있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직접 본 것은 2008년 대구 수성을 선거 때. 시민광장 사람들과 주말마다 유세 지원차 거리에 나갔었다. 이후로 벌써 2년이 흘렀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학자의 길을 걸었을 사람이, 그랬으면 개인적으로는 훨씬 행복했을 사람이 늘 이 척박한 대한민국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 모습이 때로는 안쓰럽다. 허나 어떡하나, 그만한 인재가 없으니. 시대가 그를 그곳으로 떠밀었다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비범한’ 독서 능력이 그의 '비범한' 삶의 방식과 연결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때의 ‘비범한’이란 단순히 이해력이 좋다거나 재기발랄하다거나 학구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책에서 읽어내는 세상의 모순, 자기 시대에서 읽어내는 모순, 그 둘을 연결해서 바라보고 방향을 모색하는 능력,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늘 삶/실천과의 긴장 속에서 되짚어보는 태도 등을 의미한다. 그는 모순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고, 고민과 실천도 남달랐다. 모순이 크다고 주저앉거나 절망하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갔다. 서문에서 밝힌 바 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려고' 태어났으므로. 그는 자기 식대로 세상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책을 어떻게 읽느냐는 결국 어떤 식으로 사느냐와 직결되는 것 같다. 이 책은 ‘책은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우쳐준다는 점에서도 훌륭한 가이드가 된다. 책에는 내가 좋아한 작품들도 여럿 나오는데, 저자는 나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길어내고 삶을 성찰하고 있었다. 나의 얄팍한 읽기와는 대조적이었다. 내 경우, 이 책의 부제인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을 충분히 읽지 못했기에 그럴 지도 모르겠다. 독서 태도의 차이가 곧 삶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그래서 했다.
내가 사춘기 때 좋아한 러시아 문학들이 많이 나와서 반갑기도 했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가난한 사람들.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대위의 딸 등. 뜻도 잘 모르면서 다 좋아했다. 광대한 러시아 땅과 러시아 민중을 느끼게 했다고 할까. 사회/역사의 물결 속에서 형성되는 개인적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대작들이다. 성인이 된 후로 다시 본 적이 없는데, 다시 읽으면 새로울 것 같다. 모두 읽어보고 싶다. ‘역사란 무엇인가’도 대학 때 스쳐가며 읽었는데 이번에는 꼼꼼하게 새로 읽어보고 싶다.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선언', '인구론', '종의 기원' 등은 제목만 아는 것이고,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등은 완전 처음 보는 거라서 좋은 소개가 되었다. 독일판 조중동 언론의 폐해를 다룬 ‘카타리나 블룸의 읽어버린 명예’ 편도 이런 걸 몰랐다니, 하며 감동적으로 보았다. 원작을 꼭 읽어봐야겠다.
'청춘의 독서' 제목 참 멋지다. 청춘의 힘과 아름다움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세상을 고민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드넓은 세상과의 만남,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세워가면서 쌓아가는 생각의 질이 이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청춘의 시기에 만난 좋은 책들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 과언이 아니다.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을 읽는다면. 청춘의 화두를 평생 실천하고자 애쓰는 사람이 영원한 젊은이다. 저자 역시 50이 넘었음에도 감성적으로는 삼십대로 느껴졌었다.
책에서 만난 좋은 구절을 좀 남겨두고 싶은데, 선물로 주고 없다. 소장용으로 한 권 더 주문해야겠다.
책 이야기/에세이
청춘의 독서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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