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땐 별 생각 없이 읽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 매우 특이한 소설이다. 작가는 카스타리엔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창조하고, 그곳에서 각각 다른 삶의 행보를 보이는 크레히트, 데시뇨리, 테리굴리우스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 및 인간성의 향방을 탐구하고 있다. 의미 있는 여성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으며, 가정 역시 불완전한 곳으로 묘사된다. 작가 헤세의 전기적 사실을 심층적으로 안다면 작품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질 듯한데 읽으면서 그 점이 다소 아쉬웠다.
소설에 등장하는 카스타리엔은 수도원과 비슷하나 그와는 성격이 다른 일종의 학문 공동체다. 구성원들은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지만 종교가 아니라 지식에 봉사한다. 무엇을 연구하든 그건 전적으로 자유이며 국가가 기본적 생계를 보장한다. 이백 년쯤 되는 이 새로운 공동체는 세계대전의 회오리가 지나간 후에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지키고 그것을 고양시키려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유리알 유희는 그 공동체의 지적 명상의 힌 방법이자 공동체 구성원들을 결속시키는 축제의 도구였다. 카스타리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의례라고 볼 수 있겠다.
주인공 크네히트는 유리알 유희의 명인이다. 고아였으나 탁월한 음악적 재능으로 이른 나이에 영재로 선발되어 세속을 떠나 카스타리엔에서 거주하게 된다. 그는 조화로운 성정을 지녔으며 음악 및 유리알 유희의 재능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력 때문에 자연스럽게 카스타리엔의 최고위직에 오른다. 그의 친구 데시뇨리는 세속의 인간이지만 카스타리엔에 초대된 인물로 학창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며 크레히트와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데시뇨리는 세속으로 돌아간 뒤에 카스타리엔의 정신과 세속의 생활을 양립시키는 데 실패하고 카스타리엔에서 배운 지식과 명상의 힘을 세속에서 펼쳐나가지 못한다. 크네히트의 또다른 친구 테리굴리우스는 천재적 재능을 지녔으나 지나친 개인주의와 반골 정신으로 타인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크네히트에게는 그의 그러한 야성이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테리굴리우스는 크네히트의 도움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카스타리엔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크네히트는 그 뛰어난 지성과 통찰력으로 깨닫게 된다. 카스타리엔의 정신은 데시뇨리를 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테리굴리우스가 지닌 성격적 결함에 의해 언제든 붕괴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크네히트는 카스타리엔에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가 결핍되었음을 알아보는데 그것은 역사 의식이었다. 베네딕트회 야코부스 신부는 카스타리엔이 시대 및 역사와의 호흡 없이 추상적 지식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크네히트는 야코부스 신부와의 우정과 교재에 힘입어 카스타리엔의 지성이 세상을 이끌고 변화시킬 힘이 없음을 깊이 인식하고 그곳을 떠나고자 한다. 그리고 세속의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소망을 품는다.
이러한 크네히트의 일대기는 그가 자신을 키워낸 카스타리엔 공동체를 스스로 떠나 데시뇨리의 아들 티토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끝맺는다. 티토는 부모의 과잉보호로 버릇없이 자라났지만 젊고 의욕이 넘치며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담담하고 관조적인 문체로 진행되는데 티토가 새벽에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에서 수영하며 일출에 감탄하는 광경은 크네히트나 데시뇨리,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한 젊음과 신선한 열정을 내뿜고 있다. 티토는 자연의 경이에 감탄하며 기쁨에 겨워 크네히트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크네히트는 그의 생에서 처음으로 본능과 이성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를 따른다. 그 결과는 심장마비로 인한 죽음이지만 그의 죽음은 티토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책임감'을 숙제로 부여한다. 티토는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통감함으로써 한 단계 성장한다.
소설을 다 읽고 카스타리엔과 크네히트가 유럽의 지성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네히트는 카스타리엔이 낳은 인물 중에서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최고의 재능과 지성과 인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카스타리엔이 미래에도 존속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세속 사람들이 카스타리엔의 존재에 회의를 품을 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운명이라고 보았다. 카스타리엔의 학문은 점점 추상적인 방향으로 흘러 세속과의 연결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온실 속의 화초인 것이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유럽의 지성이 그처럼 허약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스타리엔의 학문 풍토는 고상하고 지적이며 아름다웠지만 예술과 열정, 인간이 지닌 다양한 종류의 본능의 힘을 포괄할 수 없었고 과거에 대한 천착이 시대를 읽는 역사적 감각과 새로운 창조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말 그대로 '불임'의 공간이었다. 헤세는 유럽의 지성이 그와 같다고 보고, 새로운 희망을 티토에게서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티토는 그의 젊음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좌충우돌하며 방황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크네히트를 스승으로 받아들인다. 티토가 크네히트와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그는 크네히트의 죽음을 통해 타인에 대한 책임을 배웠다. 독자는 티토가 잡초 같은 생명력과 더불어 지성을 지닌 인물이 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유럽의 지성이 낡아가고 있는 데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과 우리의 인간성이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빠질 수 있는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의문이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헤르만 헤세는 카스타리엔의 지성이 아름답지만 그것이 정말 힘이 없음을 그려내고 있으며, 크네히트와 티토를 통해 새로운 인간형을 탐구하고 있다. 성과 속의 조화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다르타> 등 헤세 소설의 주요 테마이다. <유리알 유희>의 크네히트는 나르치스보다 조화로우며 세속을 끌어안고자 하고, 티토는 골드문트보다 안정감이 있고 리더가 될 자질이 있다. 또한 크네히트와 티토는 싯다르타에 비해 역사적, 현실적 문제 의식을 지닌 인물들이다.
다만 인간성을 탐구하는 소설임에도 인간 품성 형성의 기초가 되는 가정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점, 남녀의 사랑이 등장하지 않는 점은 다소 낯설었다. 오늘날 학교교육의 토대를 이룬 것은 프러시아의 학교제도인데 이는 국가가 가정을 대신하는 것이다. 헤세의 소설에도 어쩔 수 없이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물론 헤세는 나찌에 반대했으며 시대의 억압적 분위기가 그의 소설에서 느껴진다는 의미. 그의 주인공들은 크눌프, 데미안, 수레바퀴 밑의 주인공, 골드문트, 싯다르타 등 방랑자 혹은 종교적 해탈을 추구하는 이가 많다), 한국 독자들이 특히 헤세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 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아울러 든다.
덧붙임) 1962년(향년 85세)에 사망한 헤세로서는 68혁명과 같은 급진적 변화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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