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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소설, 시

<눈 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by 릴라~ 2013. 8. 15.

 

 

우리가 두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단순히 사물과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진데 말입니다. 여기, '볼 수 있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두 눈으로 정말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되묻게 하는 작품이 있어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입니다.

 

소설은 '실명'이라는 원인 모를 병이 뒤덮은 한 도시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사람들은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마음까지 같이 멀게 돼요. 눈 먼 자들이 갇힌 병동은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함 속에 내버려지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희망은 말소되고, 그곳을 지배하는 건 언제 끝날 지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의 신음뿐입니다.

 

단 한 여인만이 볼 수 있었고 그녀는 남편과 그 곁의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의 가슴까지 눈멀지 않도록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그건 마치 어둠 속에 작은 빛, 실낱 같은, 희망이라기엔 너무 가냘픈, 그러나 그들이 영영 깜깜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그런 빛이었어요. 그 여인과 함께 있었던 이들은 비록 눈이 멀었으나 다른 이들과 달리 그들의 온 존재까지 어둠에 삼켜지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인류와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끈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한 인간 존재로서 그들의 존엄을 조금씩 지켜내요. 그리고 그들이 과거에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보려 하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던 '함께 함'의 축복을 누리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죽음이 강타한 도시, 오물과 쓰레기, 먹이를 찾는 싸움으로 뒤범벅 된 세상 속에서도 눈이 먼 한 작가는 종이 위에 그가 겪은 일들을 적고 있어요. 그가 눈 멀지 않은 여인과 헤어질 때 남긴 말은 마치 이 소설 전체의 주제처럼 묵직하게 울립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p.414) 그를 만나고 돌아온 날, 여인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눈 먼 이들에게 몇 페이지의 책을 읽어주고 그 장면은 소름끼칠 만큼 인상적이예요. 인간을 인간으로 지켜주는 모든 것들을 잃고 어둠 속에 내팽겨쳐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인가를 이처럼 담담하고 아프고 리얼하고 환상적으로 그리는 작품이 또 있을까요.

 

문체가 주는 효과도 독특합니다. 눈 먼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인물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의사는, 붕대를 감은 남자는, 색안경을 낀 여자는, 의사의 아내는,,,, 시종일관 이렇게 사람들을 지칭하며 전개되는 소설은 오히려 이름을 안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를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 일 없이,  타자를 온전한 그 사람 자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거리'를 확보해주고 있어요.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기에, 현실이 아니라 마치 꿈 속의 풍경을 거니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소설 말미에 이르면 세상에 다시 빛이 찾아오지만 나는 그것이 저절로 일어난 사건 같지 않았습니다. 눈 먼 자들의 세상 속에서 단 한 명 볼 줄 알았던 여인의 인간적 용기와 신뢰, 그 여인과 함께 있었던 이들이 온갖 끔찍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영영 잃어버리지는 않았고, 새롭게 되찾은 마음의 빛이 이 세상에 다시 '눈뜸'을 불러온 것 같았어요. 눈이 멀지 않은 한 사람이 있는 한 그곳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부활할까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물었다.

이 여자는 아니야, 부활하지 않아, 의사의 아내가 대답하고는 덧붙였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활하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못하고 있지. 우리는 이미 반은 죽었어." (p.426)

 

어쩌면 '본다는 것'은 우리가 반쯤 죽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알아차림이 아닐까요? 작가는 눈 먼 도시의 비참을 통해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소중한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 있어요. 그것은 두 눈에 비친 감각적 영상 이상을 '보는 힘'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고 되찾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우리예요." (p.388).

 

그리고 소설은 가장 중요한 자각을 우리 안에서 이끌어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이란 혼자서 지켜갈 수 없다는 사실이예요. 나뿐 아니라 너 또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만 우리는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를 인간적인 시선으로 지켜보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그리고 타자를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가 지닌 육체의 표면을 넘어서 그의 내면의 자리한 것들에 다가갈 수 있는 힘이예요. 인간이 부활할 수 있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바로 그런 힘을 통해서일 것입니다. 미약해보이지만 그것이 가장 강한 힘이예요.

 

 

 

"그러니까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너무 적다는 뜻이에요. 또는 우리가 감정들은 가지고 있지만 그 감정들이 표현하는 말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거나. 그래서 그 말들을 잃어버리는 거죠."(p.411)

 

"내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주의깊게 볼 거야, 마치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p.388)

 

 

 


눈먼 자들의 도시

저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09-11-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도시에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안 보이는 `실명` 전염병이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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