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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소설, 시

[1984 / 조지 오웰] __ 독재자의 망령이 지배하는 사회

by 릴라~ 2013. 2. 13.

 

 

 

오래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저자가 묘사한 1984년이 도래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2013년, 다시 이 명저를 집어들면서, '1984년'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수많은 사회 속에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외부당원 윈스턴이 '진리국'에서 하는 일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조작하는 일이다. 실제 일어났던 모든 사실들이 당의 요구에 맞게 수정되고 재선포되며 당의 의도에 배치되는 사실들은 영구히 폐기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당이 전하는 모든 것을 당연시 여기며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진위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윈스턴은 무엇이 진실인지 회의하지만, 오세아니아 밖에서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며(당의 말로는 늘 전쟁 중이었다), 그가 진실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형제단'조차 당의 음모였음이 밝혀진다. 윈스턴은 당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든 줄리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만은 꺾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의 마음속은 그들이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집요한 고문은 마침내 그의 내면까지 바꾸어내는데 성공한다. 줄리아에 대한 사랑은 차갑게 식고 그의 가슴에 남은 것은 빅브라더에 대한 충성심 뿐이다.

 

조지 오웰이 이처럼 완벽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어떤 상황에도 불굴의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남는 인간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어떤 방식으로 이어져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 개개인의 삶은 자동기계인형과 다를 바 없다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은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정보와 관념으로 가득찬 세계, 언어화된 세계이다. 24시간 각종 매체를 통해 상식이란 이름으로, 사실이란 명목으로 우리에게 강요되는 말들이 왜곡된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과 비슷한 환영 속을 부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2013년 새해, 대한민국. 북핵실험을 비롯해서 장관 인선까지, 뉴스와 신문에서 쏟아지는 각종 말들이 실감이 나지 않고 마치 환영처럼 현실과 분리되어 떠다니는 것 같다. 삶과 붙어 있는 말들이 아니라 언론-기계가 생산해낸 모조품 같은 말들. 그리고 그보다 더한 환영처럼, 과거의 망령처럼 허깨비처럼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유신공주의 얼굴. 독재자라기보다는 독재자의 망령. 그 망령이 지배하는 사회.

 

서구의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들은 모두 파시즘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그들 사회가 전체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전체주의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품고 그것을 경계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경험은 그들만큼 충분하지 못했던가. 삼백만이 죽어간 내전 6. 25. 삼십만이 죽어간 보도연맹 사건. 이후 독재에 의해 소리없이 죽어간 많은 이들. 아버지는 독재의 피해를 국민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겪어서 독재에 대한 저항감이 약한 거라고 하시지만, 그 시대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인 내가 보았을 때, 죽은 이들의 '숫자'로만 보아도, 우리들의 경험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충분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이렇게 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이 일했던 '진리국'처럼 사실을 끊임없이 왜곡해서 전달하는 언론/권력 환경 때문이 아닐까. 이는 단지 언어가 전달하는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적 '감수성'의 문제이다. 뉴스 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같은 문화 상품 역시 자유에 대한 '감각'보다는 사도마조히즘적인 감수성과 센티멘탈에 호소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감각은 독재/전체주의에 대한 반발과 분리될 수 없다.

 

근대사를 제대로 조명하는 것. 각각의 사건들과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들을 낱낱이 해명하고 좀 더 긴 시간의 맥락 안에서 철저히 비판할 것. 그것을 단지 진실규명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에 걸맞는 언어와 담론, 예술 작품들을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문화적 감수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 이런 일들이 쉼없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물론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한 세대의 삶에 대한 '감각'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지 오웰 같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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