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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스토리텔링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

by 릴라~ 2013. 3. 31.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하는 작업입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소설을 만드는 모든 것이 그 재료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서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중심부의 징후는 사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든 세부 사항, 즉 거대한 풍경의 표면에서 마주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pp31-32)

 

 

소설은 삶의 가장 표면에 있는 모습, 그러니까 우리 감각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사적인 경험과 지식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때로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그러니까 중심부에, 삶의 본질에, 톨스토이가 '삶의 의미'라고 했던 것에(우리가 뭐라고 명명하든지 간에), 다다르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낙관하는 그곳에 대한 지식, 직관, 실마리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과 관련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귀중한 지식에, 철학의 난해함이나 종교의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도,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입니다. (pp33)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작은 관찰로부터 출발하여, 처음에 약속했던 감춰진 진실로, 중심부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관찰을 '감각적인 경험'이라고 합시다. 창문을 열 때, 커피를 홀짝거릴 때, 계단을 올라갈 때, 도시의 인파를 헤치고 들어갈 때, 교통 체증에 걸려 차 안에서 지루해할 때, 손가락을 문에 끼였을 때, 안경을 잃어버렸을 때,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비탈길을 올라갈 때, 여름에 처음으로 바다에 들어갈 때, 아름다운 여자와 만났을 때, 어렸을 때 먹은 비스킷을 다시 먹었을 때, 전혀 알지 못했던 꽃의 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 키스할 때, 난생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을 때, 질투심에 휩싸였을 때,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셨을 때 경험한 고유한 느낌이 다른 사람들의 비슷한 경험과 겹쳐진다는 사실은 소설을 이해하고 즐기는 데 바탕이 됩니다. (pp49-50)

 

 

젊은 시절 나는 소설을 진지하게 여기면서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순문학 소설은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개인적인 결정들이 모여 우리 삶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에게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폐쇄적인 전통 사회에서는 소설 예술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소설 예술이 발전하게 되면 소설은 인간의 사적인 특징, 감각, 선택들에 대한 치밀하게 구성된 문학 서사를 제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끔 이끕니다. 전통적인 서사를 제쳐 두고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신, 황제, 장군, 군대, 국가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계와 선택도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나는 끊임없이 소설을 읽으며 자유와 자신감이라는 감각을 충격적으로 경험했습니다. (pp61-62)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 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들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설 예술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순간은 소설가가 정치적 관점이나 소속 정당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문화, 계층, 성별 등에서 우리와 전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할 때입니다. 도덕적, 문화적,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공감을 통해 동일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pp71)

 

 

소설 쓰기와 읽기에는 자유와 관련된 매우 특별한 측면도 있습니다. 다른 삶을 모방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상상하는 일에는 윤리 문제도 연관되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소설 쓰기의 가장 즐거운 측면 가운데 하나는, 작가가 자신을 소설 캐릭터의 위치에 놓고 탐색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나가면서 자신이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소설가는 오로지 주인공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고, 서서히 주인공과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설가로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화되고 나 자신 밖으로 나가, 이전에 내가 소유하지 않았던 캐릭터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35년 동안 소설 쓰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위치에 나 자신을 놓으며 내 영혼을 길들였습니다. (pp73)

 

 

 


소설과 소설가 (양장)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9-1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소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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