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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스토리텔링

서정에 대하여;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에밀 시오랑

by 릴라~ 2016. 11. 3.

<발췌>

 

고통스러울 때, 사랑을 느낄 때, 인간이 서정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통과 사랑이란 그 성질과 지향성은 다르지만, 존재의 아주 깊은 곳, 즉 나의 중심으로부터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정적이 되는 것은 내면의 삶이 인간 본연의 리듬으로 진동할 때이다. 우리 각자가 유일하고 특별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주 선명하게 표현되어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차원으로 이행하게 된다. 저 깊은 곳에 있는 주관적 경험이 가장 생생한 이유는 본질과 만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내면을 성찰하게 되면 사람은 보편성으로 다가서게 된다. 반면, 본질의 주변에 멈추어 있는 사람은 보편성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정적인 것을 정신박약에서 오는 저질적 현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나의 가장 깊고 생생한 내면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이 서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정적 순간에만 서정적이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맞는 고통의 순간, 지나간 시간이 되살아와 폭포처럼 덮치는 그 순간이 돼서야 비로소 서정적이 된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절박한 경험을 한 뒤 심층의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정적이 된다. 자기 자신이나 심층적인 현실을 외면하는, 객관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일지라도 일단 사랑에 빠지게 되면, 감정이 자신을 움직이는 에너지의 온전한 원천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시를 쓴다는 사실은 개념적 사고가 내면의 동요를 표현하는 데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정은 비이성적이며 가변적인 표현을 통해서만 적절하게 객관화할 수 있다. 자신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세상에는 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 고통을 경험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주관성이라는 끝없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지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고통의 서정은 내면을 정화한다. 그 정화 작용 속에서 상처는 내용물이라고는 없는 단순한 표출이 아니라 깊은 존재의 본질 자체와 교감한다. 서정이란 피와 살과 신경의 노래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병들은 서정적 효과를 유발한다. 부끄러울 정도로 무감각한 사람들만이 병이 들어도 비인간적으로 남아 있다. 병은 내적으로 심오하게 만든다.

 

사람은 몹시 힘든 신체적 괴로움을 겪고 나서야 진정으로 서정적이 된다. 외적 이유 때문에 돌발적으로 서정적이 되기도 하지만, 원인이 사라지면 서정은 함께 사라진다. 정신적으로 약간 미치지 않으면 서정적이 될 수 없다. 정신착란 초기 단계의 특징은 이성의 경계가 무너지고 정신적 도취에 빠진다는 것이다. 정신병이 시작될 때 풍부한 시적 창작력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신착란은 서정의 절정인가? 서정성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정신착란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서정성이란 형상이나 체계 너머에 있다. 정신의 모든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집중되어 하나의 충동으로, 유연한 흐름으로 뒤섞여 완벽하고 밀도 높은 리듬을 만들어낸다. 프레임과 형상에 갇혀 모든 것을 위장하는 세련된 문화의 경직성과 비교하자면, 서정성은 야만적이다. 서정성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오로지 피와 진정성과 불꽃이라는 데에 있다. (p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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