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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 임인덕 신부 이야기> - 권은정

by 릴라~ 2013. 7. 11.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역만리 먼 곳에 와서 생전 처음 보는 타국 사회와 사람들을 위해 평생 살아간 이들이 있다. 어떤 종류의 가르침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 이분들의 특별한 헌신을 가능하게 했을까.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 한국명 임인덕 신부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임인덕 신부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평전이라기보다는 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스케치이다. 그의 개인적인 목소리를 좀 더 또렷이 살려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한 독일 청년이 우리 시대를 읽어냄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이해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서 참 좋은 책이었다. 강남의 대형교회가 한국 종교의 현주소가 된 지금, 종교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오늘날의 종교 특히 개신교의 '정치세력화'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구한말서부터 시작된 가톨릭 및 개신교의 선교사들의 지향점은 이와는 달랐다(가톨릭이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것은 오점으로 남아있다). 스페인의 총칼과 함께 시작된 남미의 가톨릭 역사가 그러하듯이 서로 다른 문화와의 만남은 전쟁과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 사회와 서양 종교와의 만남은 그와는 상반된 여정을 보여준다.  프랑스와 독일 출신의 신부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자 했으며, 특히 암흑의 군사 독재 시절에 그분들이 세상에 드리워준 빛은 결코 적지 않다.

 

임인덕 신부의 소년 시절 이야기는 나찌 치하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철도기술자였던 임 신부의 아버지 요제프는 나찌에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살해당한 동료의 장례식에 혼자 참석할 만큼 용감한 시민이었고, 수용소에 끌려갈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찌를 탈당한다. 전쟁이라 모두 굶주리는 시절임에도 자신의 어린 아들이 나찌의 선전 구호를 외치고 당국이 주는 초콜릿을 받아가는 것을 단호히 금지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찌에 단순히 부역한 이웃들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 애썼다.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신부가 되는데 형인 하인리히는 베네딕토회 신부로서 한국에서, 동생인 빌리발트는 아프리카 선교회에 자원하여 잠비아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다.

 

책과 영화를 사랑했던 임인덕 신부의 재능은 1971년 '분도출판사'를 맡으면서 활짝 꽃피게 된다. 그는 운동이나 투쟁의 선봉에 선 적은 없지만 그가 세상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선한 책'을 만들어 펴냄으로써 우리 사회에 특별한 기여를 하게 된다. 그는 실천적이고 도전적인 성서 해석서들을 펴내기 시작했는데 1973년에 카마라 대주교의 '정의에 목마른 소리'는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보수적인 천주교중앙협의회는 분도출판사의 책 판매를 중단할 뿐 아니라 그동안 분도출판사에 맡겨 오던 모든 인쇄를 중단하겠다고 알려온다. 수도회는 충격을 받지만 임 신부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어떤 책을 출간할 것인가는 출판사에 달려있으며 출판의 자유를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직접 책을 싸들고 서울의 서점들을 오가며 영업에 뛰어든다. 대학가에서 책이 많이 팔리면서 분도출판사의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는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을 중시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지금 세상에 꼭 필요한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일에 몰두하게 했다. 페루의 신학자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은 분도출판사를 한국 사회에 가장 널리 알린 책들 중 하나이다. 1977년 번역서가 출간되자마자 보수 성향의 사제들은 드러내고 반대했다고 한다. 임 신부는 보수적인 대구교구가 아니라 김수환 추기경이 있는 서울 교구에서 출판 승인을 받았지만 곧 우리 정부로부터 공산주의 성향의 책으로 평가되어 판매 금지 처분을 받는다. 임 신부는 책이 불태워질 것을 염려해 초판 3000부를 밤새도록 다락방에 옮겨 숨기고, 이 책은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즈음 분도출판사의 책은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많았다. 결국 아예 전담 형사가 배치되어 임 신부를 감시했지만, 이에 대한 임 신부의 대처는 매우 전략적이었다. 모 대학 교수가 쓴 사회학 책에서 저자가 '국민'이라는 표현을 몽땅 '인민'으로 표기했는데, 검열관은 모두 고치라고 한다. 임 신부는 보안 당국에 검열받는 책 6권의 '인'자를 위에 모두 '국'자를 붙여서 수정한다. 그리고 출판은 원래의 단어 그대로 두었다. 검열 당국이 자신의 힘의 '증거'를 보았으니, 실제 출판된 책에는 관심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임 신부는 꼭 종교 서적이 아니라 인문,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 사회에 필요한 책을 소개하고자 애썼다. 사진작가 최민식의 작품집을 제일 먼저 펴낸 곳도 분도출판사였다. 내가 학생 때 사랑해 마지 않았던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또한 분도출판사가 낸 베스트셀러라 한다. 당시 분도출판사가 펴낸 우화 시리즈는 기존 출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해인 수녀의 시집 또한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그가 심혈을 기울인 책들은 따로 있었으니 신학 학술서들이었다. 한스 큉, 칼 라너, 피츠마이어, 테야르 드 샤르댕 같은 이름들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은 그의 노고 덕택이라 한다. 그는 세계 최고 석학들의 저서를 시의적절한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한국 교회를 위해 진정으로 봉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출판사 소임과 더불어 그가 사랑했던 또 다른 일은 한센인들을 돌보는 삼청동공소 사목과 미디어 관련 작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늘날처럼 영상 매체가 대중적이지 않은 시대였다. 그는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고른 모든 영화는 수준 높은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어야 했다. 작가주의 영화는 종교와의 관련을 떠나 그 자체로 인간의 품위와 양심, 인권과 평화, 삶의 의미성에 관한 심오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예술관이었다. 그래서 사업성이 없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미디어'를 통해서 좋은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하기 위해 애썼고, 지금도 미디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 지금은 영화가 차고 넘치지만, 의미 있는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훨씬 어려워졌다고 한다. 

 

1960년대 말 한국에 와서 가난과 독재의 시대를 사제로 살면서, 반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책과 영화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 있는 임인덕 신부. 그는 자신을 '나쁜 수도자'라고 표현한다. 출판의 자유를 위해서 교회 당국과 때로 마찰하며 수도자의 순명의 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란다. 그가 평생을 한결같은 뚝심으로 좋은 삶을 담은 책과 영화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작품들이 담지하고 있는 정신성을 그가 그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그가 어린 시절 독일에서 나찌 시대의 폭력과 전시의 가난을 직접 경험했기에, 책과 영화를 통해서 수준 높은 인생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계속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나는 내 나라를 아끼고 염려하는 일에도 인색할 때가 많은데, 지구 반대편의 나라를 새로운 터전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재능과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그 이타의 정신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에게는 독일과 한국을 차별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의 진정한 고향은 그가 태어난 조국뿐만 아니라 인류이기 때문이다.

 

그는 외양으로 타인과 구분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래서 지난 수십년간 로만 칼라를 착용하지 않고 낡은 셔츠를 입고 살아왔다 한다. 저자는 그가 하늘의 질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살아왔기 때문에 구태여 하느님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자유인'으로서의 임 신부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몇몇 부분적인 묘사들을 통해서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긴 가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책을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은 세상을 균형잡힌 관점으로 볼 줄 알기에 결코 교조주의자가 될 수 없다. 그가 알리고자 한 작품들은 모두 삶에 대한 진지한 도전과 응답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분 또한 그와 같은 정신성을 자기 삶에서 한결같이 견지해온 것 같다.

 

동족이 흘리는 눈물에도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이 51. 6퍼센트인 세상을 보며 자주 회의와 냉소에 젖어드는 요즈음이다. 이 책을 읽으며 좋은 책과 영화,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이 영영 깜깜해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인덕 신부의 삶이 말해주고 있다. 예술과 철학은 삶에 대한 가장 수준 높은 관점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것이 주는 의미를 '공유'하는 것은 우리 삶을 저속함에서 구해내는 지속적인 저항의 한 방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저자
권은정 지음
출판사
분도출판사 | 2012-05-0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임인덕 신부 이야기를 담은『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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