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초반은 느린 호흡에 적응하지 못해 좀 힘들게 읽었지만 후반부는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랄 만큼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가며 읽었다. 황홀한 작품이었다. 이런 말들을 읽을 수 있어서, 이런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의 후속편 격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보편적 인간성에 관한 질문을 주고 있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권력의 속성과 그것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식을 아프게 펼쳐보여준다. 읽으면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도 생각났다. 이 책이 언론이 한 인간을 죽이는 과정을 마치 신문 기사처럼 건조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사라마구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창조한 독특하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 현실보다 더 진한 현실을 체험하게 한다.
그리고 언론뿐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권력체제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우리가 안정적이라 믿고 있는 대의민주주의가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한 기반 위에 놓여져 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미래에 대한, 파시즘에 대한 경고의 외침을 작품 속에 새겨넣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를 이처럼 신랄하게, 정면에서 비판한 작품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는 우리가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선거일에서 시작된다. 주민들은 두 차례에 걸쳐 백지투표를 하고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는 정부는 수도를 옮기기로 작정하고 도시에서 철수한다. 도시에는 계엄령이 내려지고 정부는 고귀한 품성을 지녔고 타인을 위해 자기를 헌신했던 의사부인을 백지투표의 배후로 만들어 희생시키고자 작정한다. 부당한 권력 앞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의사 부인을 구하고자 경정은 자신이 본 일을 기록하고 세상에 이를 알리려는 그의 시도는 잠깐 빛을 본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그렇듯이 결국은 관련된 이들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어슴프레하게나마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경정이 남긴 기록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살아남아 싹이 트리라고 예감할 때에 한해서이다. 과연 그 말들은 현실을 이기고 시간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작가 또한 그의 말들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다시 합쳐지고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이 소설이 주는 묵직한 감동은 진짜 말이 사람의 내면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부활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에서 비롯되는 듯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리라. 소설의 주인공들은 패배하고 현실은 여전히 회색빛이지만, 그 말들은 살아남았노라고.
왜 우리한테 이렇게 해주는 거죠, 왜 우리를 돕는 거예요.
책에서 읽은 것 때문이오, 오래전에,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며칠 전에 생각이 났소.
그게 뭐죠.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좋네요, 생각을 자극하는 말이에요, 그 책 이름이 뭐지요.
창피한 이야기지만 기억나지 않소.
괜찮아요, 다른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해도, 심지어 제목도.
책을 쓴 사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구려.
그 말은 아마 전에 누구도, 적어도 그런 똑같은 형식으로는 이야기한 적이 없을 거예요,
어쨌든 그 단어들이 서로를 잃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 단어들은 자신들을 합쳐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누가 알아요, 우리가 혼자 떠도는 단어들 몇 개를 합쳐줄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질지.
아, 그 경멸당하는 가엾은 녀석들은 결코 서로를 만나지 못할 것 같구려.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꿈꾸는 것은 싸요, 돈 한 푼 안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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