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이 되면 학교는 교사들로부터 업무분장 신청서를 받는다. 다음 학년에 맡을 업무에 대한 수요 조사를 하는 것이다. 나는 3학년을 신청해놓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현수만 우리 반 아니면 아무 걱정 없겠다고. S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다른 학년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수수한 학생들이었고, 1학년 때도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기에 다시 만나는 것이 크게 부담이 없는 학년이었다.
옛말 하나도 그른 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하필이면 현수가 딱 우리 반에 배정된 거다. 작년에 사고란 사고, 말썽이란 말썽은 혼자 다 부린 싸움꾼, 안현수! 담임 교사에게 시시때때로 반항을 일삼은 건 물론이다. 3월 새학년 새학기를 시작하는데 마음에 알 수 없는 먹구름이 왔다 갔다 했다.
첫 한 주일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그 다음 주 실장 선거를 하는 날이 되었다. 후보자 추천을 받는데 현수가 손을 번쩍 들고 지원을 했다. 나는 속으로 몹시 당황했다. 혹시나 얘가 실장에 뽑히면 어쩌지? 남자 중학교에서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학생들이 별 생각 없이,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 깡패 같은 녀석을 실장으로 뽑는 일이. 그러면 일 년 동안 그 반은 말아먹는 거다. 학생회장 선거에서도 한번은 그런 양아치 같은 녀석이 뽑힌 적이 있어서 내 불안은 상당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안타깝지만 작년에 폭력 사건을 일으킨 학생은 후보 자격에 제한이 있다고. 올해 열심히 살아서 내년에 꼭 선거에 나가보라고. 나는 마음에도 없는 격려를 하면서 현수가 선거에 나오는 것을 슬쩍 막아 버렸다.
십여 년 전이니 그렇게 넘어갔을 것이다. 사실 당시 나는 우리학교 교칙에 후보자 등록에 관한 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은 교칙이 정비되고 피선거권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만 당시는 일이 다소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니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날은 그렇게 무사히 지나갔다. 사건은 며칠 지나서 터졌다. 당신의 아들을 선거에 못 나오게 한 데 앙심을 품고 현수 아버지가 학교로 쳐들어온 것이다. 3학년 교실이 모여 있던 5층 복도, 수업 중이라 조용한 복도에 육중한 몸집을 한 중년 남자가 나타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3반 담임 어디 있어? 빨리 나와!! 왜 우리 아들을 실장 못하게 해!"
현수 아버지는 담임 나오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나는 3학년 교무실에 있었는데 현수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휴게실로 숨었다. 현수 아버지는 3학년 교무실에 와서도 십여 분을 계속 해서 소리 질렀고 다른 선생님들이 달래어 교장실로 내려갔다. 현수 아버지가 소리 지르는 동안 학생들이 구경한다고 난리가 난 것은 물론이다. 3학년 전체가 무슨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듯이 교실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그 광경을 목격했다.
현수 아버지는 1층 교장실로 내려가자마자 명함을 50장쯤 탁자 위에 좍 깔면서 형님들 다 부르겠다고 교장 선생님께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제 지난 일을 청산하고 새 마음을 먹고 한번 잘해보려는 아이의 기를 담임이 팍 꺾어놓았다는 것이다. 현수가 사는 동네는 좀 오래된 주택가이고 현수 아버지는 동네에서는 다 아는 깡패인데, 애들 말로는 사채업자 밑에서 돈을 받으러 다니는 그런 일을 한다고 했다. 조폭이라고는 하지만 대장은 아니고 좀 지위가 낮은 그런 조폭이라나.
아무튼 교장 선생님은 어찌어찌 현수 아버지를 잘 달래셨다. 요즘 같으면 경찰을 요청했을 지도 모르는 일인데, 몇 시간 걸려서 현수 아버지를 설득했다. 나는 현수가 실장 선거에 못 나간 대신에 체육부장을 시켜놓았었다. 교장 선생님은 그것 보라고, 담임이 현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고, 그 학생에게 가장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거라고, 이제 학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니 잘 지켜보자고 그렇게 달래셨다.
현수 아버지는 실력 행사에 만족한 것 같았다. 자기 아들을 차별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남기고 그 날은 돌아갔다. 나는 다음 날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전화하니 교장 선생님께서도 많이 놀랐을 거라고 하루 쉬라고 하셨다. 정신적 충격으로 학교를 하루 쉰 것은 이 날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날 현수 아버지의 시위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현수는 우리 반에서 아무런 말썽도 부리지 않았다. 아니, 부리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2학년 때는 현수 곁에서 호가호위하며 또래를 겁주던 아이들이 몇 있었는데, 우리 반에서는 그런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아이들은 현수와 어울려 다니지 않았고 현수 편을 들지도 않았다. 중학교 3학년은 사리분별을 하기 시작하는 나이이고 그 날 현수 아버지가 학교에서 고함을 지르는 광경을 본 아이들은 현수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우리 반에 태권도 3단인 명신이를 비롯하여 전교에서 제일 덩치 큰 녀석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아이들은 그들을 4대천왕이라고 불렀다. 덩치는 크지만 순박하고 착한 4대천왕이 교실에 떡 하니 버티고 있어서 현수가 함부로 까불 수가 없었다. 2학년때 전교를 주름잡던 현수가 3학년이 되면서는 키가 별로 크지 않아서 그 아이들에게 덩치로도 한참 밀린 탓도 있었다. 현수 뒷자리에 명신이를 앉혔는데, 현수는 감히 우리 반 아이들을 건드릴 엄두도 못 냈다.
현수는 떠들지도 않고 말도 안하고 수업 시간에 그저 얌전하게 잠만 잤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2학년 교실에 들락거리더니 2학년들과 놀기 시작했다. 2학년에게는 큰 소리를 칠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돈을 천원씩 뺏는 등의 자잘한 다툼은 있었지만 큰 말썽 없이 한 학기가 흘러갔다.
여름방학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시험이 끝나 방방 뛰는 아이들의 마음을 좀 차분하게 가라앉힐 겸 해서 학급활동 시간에 만다라를 그리는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만다라 문양이 그려진 종이를 나누어주고 색칠을 했다. 웬일로 현수도 활동에 참여했다. 결과는 썩 나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게 복잡한 문양에 괜찮은 색을 입혔다. 나는 현수가 이만큼이라도 한 것이 신기하여 "어머, 잘했네" 하며 엄청나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하나 더 하라고 한 장을 더 주며 투박한 크레파스 대신에 내 48색 색연필을 주었다. 현수는 다시 만다라 칠하기에 몰두했고 두 번째 작품은 색이 훨씬 부드럽고 조화되었다. 애들도 옆에서 괜찮다고 한 마디씩 했다.
"더 해볼래?" 라고 물으니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루 종일 자는 게 이 아이로서도 심심했을 것이다. 그 날 이후로 현수는 1교시부터 7교시까지 만다라를 칠하다가 자다가 했다. 그리고 현수의 만다라는 점점 밝고 환한 색으로 변했다. 현수가 고른 색깔들은 특별히 환했고 전체가 조화로웠다. 그 색색이 모여 완성된 만다라는 명상적이고 은은하고 밝고 화사했다. 그 아이의 내면에 그런 빛깔이 감추어져 있으리라고는 나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물론 현수가 할 수 있는 건 색칠밖에 없었다. 만다라 문양을 직접 디자인하는 것은 못했다. 현수가 칠한 만다라를 미술 선생님께 보여드리니 깜짝 놀라셨다. 미술 시간엔 기본적인 스케치도 못한다고 했다. 현수의 만다라는 점점 진화해서 색연필로 강약을 조절하면서 원래 문양에 없던 느낌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잘한 작품을 다섯 점 정도 뽑아서 가을 학교축제 때 전시도 했다.
나는 현수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서 아이가 미술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그림을 한번 시켜보면 어떠냐고 말씀 드렸다. 현수 아버지는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그런 재주가 그 아이한테 있을 리 없고 그럴 형편도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해가 다 가기 전 결국 현수는 사고를 한번 쳤다. 2학년 학생과 싸워서 이빨을 하나 부러뜨렸다. 자기를 무시했다는 거였다. 나는 두 분 학부모를 불러 중재 역할을 했는데 다행히 쌍방간에 합의가 잘 되었다. 당시는 학교폭력위원회라는 제도적 장치가 자리를 잡기 전이었다. 그때 나는 현수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에 잔뜩 긴장을 했는데, 다시 만난 현수 아버지는 봄의 그 기세등등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가 사고를 쳤다고 그렇게 풀이 죽을 분들이 아닐 텐데, 현수 아버지는 죄송하다고, 자기도 요새 일이 잘 안 풀려 사는 게 힘든데 선생님이 잘 해결해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왠지 모를 연민이 스쳐갔다. 현수 아버지가 사온 빠리바게트 빵 봉투 안에는 몇 줄로 짤막하게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일 년 동안 잘 보살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다른 선생님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현수는 공고에 진학했다. 현수에 대한 마지막 소식은 다음 해에 우리 반 아이들이 전해주었다.
“선생님, 현수 철 든 거 같아요. 학교도 안 빼먹고 다니고 주유소에서 알바도 열심히 해요.”
이후 나는 그 학교를 떠났고 그 아이의 소식도 더 이상 듣지 못했다. 현수가 안전하게 사회에 첫발을 잘 디뎠을지 아니면 자기 아버지의 길을 따라갔을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하지 못해 주먹질을 일삼던 현수의 거친 모습이 아니라 그 아이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만다라의 환한 빛깔이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밝은 색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더없이 화사하게 빛나던 만다라의 그 빛깔을 나는 여태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본질이란 겉으로 드러난 행위나 말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형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가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둔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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