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교사 시절의 나는 화를 참 많이 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젊어서 열의는 넘쳤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몰랐다. 내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오지 않는 학생들에게 매섭게 화를 내곤 했다. 이솝우화 '태양과 바람'에 나오는 지혜도 모른 채로 말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사나운 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햇빛인데도.
지금 생각하면 교실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필요한 인간관계의 스킬과 자기조절능력이 부족했지 않았나 싶다.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한 적이 많았다. 학생들의 날선 반응을 부드럽게 수용하면서 교재로 연결하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가끔 선배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지금 우리가 90년대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이미 여러 번 고소를 당했을 거라고. 그때 가르쳤던 학생들을 지금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부끄러운 마음에 숨고 싶을 거라고.
그런데 그 때, 별반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학생들이 잘 따라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제 잘난 맛에 살았던 스물 네 살의 풋내기 선생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여준 친구가 있었다. 고2 문학 시간을 일 년 동안 같이 보낸 현준이다. L고에서 만났던 학생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이다.
그 반 수업만 들어가면 학생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선생님, 현준이 얼굴 한번 봐주세요."
"현준이가 선생님 좋아한대요."
현준이는 키가 큰 편인데도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애들 말로는 일부러 문학 시간에 자리를 바꾸어 앞에 앉은 거란다. 내가 현준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 그 아이 얼굴이 살짝 붉어지곤 했다. 현준이는 별 말이 없었다. 수업 시간이면 늘 말없이, 가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가끔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그 해에 대한 기억이 그리 선명하지는 않지만 학년이 끝나갈 무렵 학생들의 초대로 밖에서 밥을 한번 먹었던 일은 생각난다. 그 자리에 현준이도 있었다. 애들이 선생님이 꼭 한번 안아줘야 한다고 해서 헤어질 무렵 현준이를 가볍게 안으며 격려의 의미로 등을 두드려준 적이 있었다. 이후 현준이는 졸업을 했고 나는 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삼 년쯤 지났을까 스승의 날이 가까울 무렵, 학교로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전남 장성군 삼계면 일병 류현준. 현준이로부터 온 편지였다.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게 처음이라고, 이제 자기는 학생이 아니라 군인 아저씨가 되었다고, 선생님도 아줌마가 된 거 아니냐고, 안부를 묻는 푸근한 내용의 편지였다. 그때 자기는 참으로 순수했노라고, 선생님이 강당 뒤에 가꾸던 꽃밭에 자주 계셔서, 자기도 자주 갔었노라고 그때가 그립노라고 했다. 고2 수업이 끝날 무렵 '아름다운 비행'이라는 영화를 보여주셔서 고맙다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18살 소년의 마음에 요즘 같은 삭막함이 아닌, 인간과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교감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다고 했다.
좋게 보면 모든 게 좋게 보인다고, 수업 시간에 본 영화 한 편을 여태까지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감성이 고마웠다. 그렇게 한 번의 안부로 끝날 줄 알았는데 몇 달 후 편지는 또다시 이어졌다. 살짝 염려가 되었는지 부담 가지시지 말라고, 그냥 군대에서의 에피소드를 편하게 들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제가 있는 부대가 장교들을 양성하는 곳이라 여러가지 시범을 많이 해요. 새로운 무기 실험도 하는데 여기에서 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전방, 후방 부대에서 시행돼요. 얼마 전에 폭파 실험을 했어요. 그때 탄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실험용 쥐랑 토끼가 동원되었는데 그 폭파 와중에도 토끼 네 마리가 살아남았어요. 그 화기의 위력이 얼마나 센지 250m 후방까지 파편이 날아왔어요. 운좋게도 거기에서 살아남은 토끼들이었어요. 이런 걸 보면 생명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폭파를 하고 폭파 현장에 가보니 정말 토끼들이 큰 대자로 누워 있는 거예요. 죽었구나 했는데 일어나더라구요. 그냥 놔두기가 불쌍해서 막사로 데리고 왔어요. 저렇게 살아남았어도 내일 되면 죽겠지 했는데 다음 날도 살아있더라구요. 혹시나 해서 막사에서 나오는 배추와 당근을 주니깐 먹더라구요. 네 마리 중 한 마리는 코에 파편을 맞아서 숨을 잘 못 쉬어요. 저 녀석은 가망이 없구나 속으로 생각했는데 차츰차츰 나아지더라구요. 지금은 그 녀석의 식욕이 제일 왕성해요.
한때는 그 토끼들을 보면서 제 군생활 계획도 세웠어요. 토끼집도 짓구, 새끼도 낳으면 산으로도 보내주고요. 옛날 군대와 달리 여긴 먹을 게 무지 많아서 먹이 걱정은 없어요. 제가 전역할 때쯤이면 한 30마리는 되지 않을까, 상상했어요.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어요. 모두들 토끼를 귀엽게 생각하고 좋아는 했지만 저 아니면 누구 하나 밥 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근무라든지 작업, 교육, 야견사격까지 들어 있는 날은 토끼에게 밥 줄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결심했죠. 짬 아주머니에게 주기로. 짬 아주머니는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을 수거해가는 아줌마에요. 혹시 아줌마에게 잡혀 먹힐까 하는 불안은 있지만 주고나니 마음은 한결 가볍네요. 산으로 보내줄까도 생각했지만 야생의 습성을 잃어버려서 굶어죽던지 맹수에게 잡혀 먹힐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번 18일부터 21일까지가 혹한기 훈련이라 토끼밥 줄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혹한기 훈련 중 누워서 본 무수한 별들이 아름답다는 이야기, 밥 맛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 때문에 군 생활이 재미있다고 했다. 군사 지역 안이라 민간인들이 잘 못 들어오는데 온산에 야생 산나물이라고, 쑥, 두릅이 제일 만만해서 주말에 따서 국 끓여먹는다고. 사격장 안에 야생 감나무가 많은데 거기서 감을 따서 곶감을 만드는 사람, 최고 고참이 백사를 잡아왔는데 알고보니 장난끼 많은 고참이 그냥 뱀에다가 흰 페인트를 칠한 거였다고. 뱀이 얼마나 아팠겠냐는 이야기. 여행 중에 답장을 보냈는지, 인도네시아에 잘 다녀오라는 이야기, 담엔 자기를 짐꾼으로 써달라는 이야기. 첫눈이 올 때는 들뜨고 좋았는데 그치지도 않고 계속 와서 이제는 눈만 오면 삽부터 생각난다고는 이야기. 봄이 되어 제초작업이 시작된다는 이야기.
봄이 와서 그런지 마음이 왜 이리 설레는지 모르겠습니다. 군대라서 그런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사회에 있을 때에는 그저 봄이 오는구나 했는데 여기에서 느끼는 봄은 희망, 따뜻함, 안도. 군에서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하고 쓰라리고 쓸쓸하기에 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아주 오랜만에 편지가 왔다. 몇 달 만이라고, 어느 정도 짠밥을 먹고부터 편지쓰기가 싫어지더라고, 그런데 떨어지는 붉은 단풍을 보니 왠지 편지를 쓰고 싶더라고 그렇게 인사를 전해왔다.
그렇게 편지는 2001년 4월부터 2003년 5월까지 현준이가 부대에 있는 2년 동안 지속되었다. 일병일 때 보낸 편지가 5통, 상병일 때가 4통, 병장일 때가 4통이었다. 스승의 날 인사, 추석 인사, 크리스마스 인사, 휴가 때 만나기로 하고 못 봤는지 다음 휴가 때는 넉넉히 시간을 내달라는 부탁도 씌어 있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나는 그 모든 편지에 답장을 하진 못했던 것 같다. 서너 번쯤 보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 그 아이는 호주에 살고 있다. 제대하고 나서 누나가 있는 호주에서 기술을 배워 정착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몇 년 전, 어느새 서른 몇 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편지 속의 현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꿈을 이루면서 사는 것 같다고. 십오 년의 시간이 지나서 나는 그 편지에 이렇게 대답한다.
꿈을 이루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아니, 지금 내게는 꿈을 이루고 못 이루고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지금 나는, 네 편지에 답장을 못한 것, 내게 주어진 작지만 고귀한 마음들을 그저 흘려 보낸 것, 하루하루를 음미하지 못한 것, 그런 것들이 아쉽다고. 내 젊음 속에 놓여 있던 수많은 빛을 놓쳐버리고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고 눈앞의 목표에 소진한 시간이 아깝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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