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동일시 이론"을 중심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자아 이론(이드, 에고, 초자아)을 설명하는 책. "동일시"가 한 인간의 자아 형성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점을 보여줄 뿐 아니라, 프로이트 심리학 전반에 대한 가장 쉽고 친절한 해설서가 되어준다. 아울러 프로이트가 융 및 라캉과 연결되는 지점도 확인할 수 있다. 정말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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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좋은 동일시를 선물하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인데, 그 이유는 사람과 사람을 연대하게 만드는 에로스와 함께, 남을 밀어내고 배척하고 이용하고 파괴하려는 타나토스적 공격 충동이 인간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격 충동을 억제하고 에로스를 확장시킬 수 있을까? 이 고민은 전쟁 재발 방지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의 중심에 배치되어 있다. p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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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는 삶의 방향성을 불어넣는 인간의 기본 축이다. 따라서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남과 연대하고 세상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 메커니즘을 동일시라 부른다. 물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프로이트는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이에 대해 설명한다. 에로스에 의한 좋은 동일시가 있고 죽음 충동에 의한 나쁜 동일시가 있으며 전자는 우리를 삶으로 나아가게 만들지만 후자는 우리가 절멸의 방향을 택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특성들에 관심을 두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배려하고 사유하는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에너지의 덩어리 같은 느낌인데, 프로이트는 그 덩어리를 충동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그는 충동을 담는 그릇으로서 이드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충동의 덩어리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살핌이다. 먹이고 보호하지 않으면 아이는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고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이렇나 인간 개체의 발달을 위한 모든 보살핌을 프로이트는 에로스 즉 사랑이라 불렀다.
충동의 혼돈 그 자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프로이트는 그 에너지가 내면을 향하는 경우를 죽음 충동이라 부르고 외부를 공격하는 경우를 공격 충동 또는 파괴 충동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죽음 충동의 방향을 야만으로 정의하고, 삶 충동 즉 에로서의 방향을 문화라 정의했다. 이와 같이 항상 개인에게만 적용되어온 정신분석은 '왜 전쟁에 반대하는가'를 통해 문화와 야만, 전쟁과 평화, 선과 악에 대한 주제로 확장된다. p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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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동일시는 충동의 혼돈에 에로스를 불어넣어 길을 내는 과정이다. 충동에 서사의 길이 나면 사람이 보이고 이와 동시에 방향이 생기며 목표가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을 우리는 양육, 발전, 성장이라고 부른다. 프로이트는 그 끝에 문화를 배치한다. 야만의 상태는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는 마음이며, 그러한 마음에 사람의 온기가 배어들게 하는 것이 바로 에로스와 동일시의 기능이다. 에로스에 의해 충동에 길이 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충동의 상태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 어떤 일은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보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의한 좋은 동일시란 한마디로 악에서 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하는 힘이다. p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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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 속에서 감정적 유대를 강화하는 모든 시도들은 전쟁에 반하는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한 유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유대는 성적인 목적이 없이도 사랑이 향하는 대상과의 관계인데,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는 정신분석이 아니라도 종교에서 이미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와 동일한 이야기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실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감정적 유대는 동일시를 통한 관계 형성입니다. 중요한 관심사를 공유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감정을 부여하며 이와 같은 동일시를 유발시킵니다. 인간 사회의 구조는 거의 이것에 기반하여 구축됩니다. (...)
문화가 유발하는 심리적 특성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지적인 부분을 강화시켜 충동적 삶을 관할하게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격적 갈망을 내면화하는 것입니다 - 이는 이득이 될 수도 있지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 .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은 동시에 전쟁에 반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 1932 프로이트, pp45-46
프로이트는 이 편지에서 이상한 주장을 편다. 정의와 폭력을 완벽하게 구분하는 것이 어렵고, 마찬가지로 에로스와 죽음 충동 역시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으며, 동일시라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정의에 이바지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폭력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그는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후 정의 역시 폭력에서 기원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발터 벤야민의 폭력론과 그 주제와 주장이 동일한 부분이다. 힘을 얻은 공동체가 그들의 힘을 정의라 부르는 것이므로 그렇게 세워진 정의는 언제든 또 다른 공동체가 힘을 키우면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pp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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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감정적 유대를 이루는 과정을 동일시라 부른다. 그것은 남의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으로서 나와 무관하게 일어난 일이 내 마음속에서 재현되며 그 고통과 분노를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들이 단결할 때 법을 바꾸고 정의를 구현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삶의 방향성을 추동하는 동력이 바로 삶 충동 또는 에로스다. 프로이트는 에로스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공격성이 수반돼야 한다고 말한다. 삶으로 나아가 폭력에 저항하고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격성을 띠어야 한다는 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본질적 충동을 삶 충동과 죽음 충동으로 구분하고 전자를 에로스, 후자를 공격 충동 또는 파괴 충동이라고 불렀다. (...) 두 충동은 언제나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지만, 이론적으로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을 구분하자면, 전자는 모으고 합하고 연대하는 방향으로 전진하는 충동인 반면 후자는 해체하고 분해하고 소멸하는 방향으로 후퇴하는 충동이라 할 수 있다. 죽음 충동은 외면화되어 외부 대상에 대한 공격 충동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삶 충동과 연대하여 에로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공격 충동이 내면되면 근원적 죽음 충동과 또 다른 양상으로 기능할 수 있는데, 프로이트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불렀다. 죽음 충동이 두 가지 방식으로 변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 충동 또한 에로스와 성 충동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pp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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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거치며 그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충동, 즉 죽음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으며, 인간다워진다는 것은 그러한 파괴력을 통제하고 그 에너지를 다른 목표로 전환하는 능력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 여정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개념은 자아다. 자아란 개인의 성격을 구성하는 내부의 중심 조직으로서 그것은 어떤 종류의 사회화도 거치지 않은 도발적 충동이 외부 대상들을 만나며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조직체다.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지점에서 자아가 탄생하며, 이 지점을 지나 자아가 세상과 맞닿게 되면 충동의 혼돈이 있던 그 부분에 규칙이 만들어진다. 어떤 일들은 가능하고 또 다른 일들은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라는 조직체에 의해 외부에 대한 고려가 시작된다. 한편 프로이트는 제어되지 않은 충동의 에너지로 가득 찬, 혼돈 그 자체인 영역을 이드라 불렀다. 그것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데, 프로이트는 그것을 "어두운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이드에는 가치와 선악의 구분이 없다. 어떤 타협도, 어떤 문화도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서 쾌락에 의해 지배되는 이드가 세상을 만나며 그 표면이 자아로 조직된다.
자아란 세상의 이미지가 내부로 동화되어 각인되는 영역이므로 이제 통제되지 않던 충동들 위에 서사가 쓰이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 최초 양육자의 사랑은 그렇게 혼돈으로서의 에너지에 처음으로 서사의 길을 내게 된다. 특정 대상에게 에너지를 전달하고 그에 대해 응답받으며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서사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이야기로서 누구의 아들, 누구의 엄마와 같은 인간관계와 어머니의 브로치, 딸의 옹아리와 같은 관계 속 세부들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의미'의 생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고 그 사람과 관련된 세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p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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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어둠 속에서 생활하던 비참한 인간이 한 신부를 만나며 삶의 새로운 서사를 쓰게 되는 이야기다. 그에게 촛대가 중요한 것은 그 사물이 신부님의 사랑을 뜻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동일시를 자신이 따르고 싶은 사람의 특성을 모델 삼아 자신의 자아를 주조하는 과정이라고도 설명한다. 우리는 그 사람을 멘토라고 부른다. 그 대상을 마음에 품으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체온과, 위장 속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모유를 대체하는 대상이다. 자아는 위장이 모유를 받아들이듯 대상의 이미지로 자신의 일부를 채운 후, 내 안에서 대상과 대화를 시작한다. 더욱 많은 멘토들을 만난다면 내 자아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p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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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연쇄살인범)가 메모한 내용들이 정상적인 사람과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곳을 채우고 있다. 그것은 정신병에서의 망상에서와 같이, 정상적인 동일시를 통해 충동이 변형되는 오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인공적으로 단시간 내에 서사를 만드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감정적 유대를 통해 감정과 이야기를 배워가는 과정에서 쓰여야 할 삶의 서사를 맥락 없이 망상을 조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던 경험에서 배운 진정으로 행복한 웃음이 아니라 실제 대상과 서사 없이 그러한 웃음을 기계적으로 흉내 내는 인위적 과정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약한 동일시는 충동의 혼돈에 길을 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경험으로 각인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 신문에서 읽은 것은 그것이 연계될 만한 자아 내부의 이미지들이 없다면, 힘 없이 흩어지게 된다. 안정적인 동일시와 자아의 분화는 양심이라는 조직을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정상적인 분화 과정이 없는 경우 그는 죄의식을 느낄 수 없다. 일반적인 발달 과정에서는 삶의 서사와 맥락이 에너지를 정향하며 충동의 혼돈이 안정된다. 그러나 그러한 안정화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스스로 인공적인 삶의 맥락을 구성해내야만 한다. 자신의 기사를 스크랩하고 프로파일링을 공부하거나 건강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은 모두 정남규가 사람의 손길 없이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왜곡된 방식이었을 것이다. pp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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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유대가 자아에 각인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이와 같은 충동을 억제하고 길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진정한 동일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외부의 서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모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외부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 사람들처럼 감정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가? 물론 답은 다시,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p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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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신자인 그는 그들을 위해 매일 연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늦어도 5년이면 다 참회하고 달라집니다. 사형수가 죽여 달라고 하는 건 뉘우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에요. 오히려 사형 집행이 사형수를 도와주는 꼴이죠."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교화'란 좋은 동일시를 도모하여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삶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중렬 전 교도관이 지은 '사형장의 황혼'에는 아무 상관 없던 남이 자아 속에 각인되는 좋은 동일시의 사례들과 변화의 과정들이 소개된다. p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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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프로이트의 조언은 조금 낯설다. 말 잘 듣는 아이는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문화와 인간 충동의 결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이를 통해 각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초자아의 지나친 횡포를 경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우리 아이들이 초자아의 목소리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 속의 불쾌'에서 프로이트는 아이들을 말 잘 듣는 사람으로 키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제목에 이미 드러나 있듯이, 문화가 우리의 유일한 답이지만, 문화 자체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충동의 혼돈만큼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장차 노출될 공격성에 스스로 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 공격은 충동의 공격인 동시에 초자아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문화의 공격이기도 하다. 그는 초자아와 양심의 목소리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교육시킨다면 아이는 세상으로 나아가 부딪히게 될 많은 역경들을 극복할 수 없게 된다고도 말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공격성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은 채 아이들을 세상을 내보내는 것은 마치 북극 탐험에 나서는 사람에게 웃는 얼굴로 여름옷을 선물하며 이탈리아 호수 지도를 손에 쥐어주는 셈이다.
양심의 목소리에 복종하라고 교육하는 것이 왜 나쁜가? 프로이트는 그것 역시 초자아의 목소리이며, 초자아는 자아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조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초자아의 명령만 들었다가는 삶의 모든 순간이 죄스럽고 모든 행동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별일도 아닌 것에 죄의식을 느끼고 고해성사를 하고 목사님을 만나고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는 아이는 지금 초자아의 횡포에 압도당하고 있는 셈이며 그런 삶 속에서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거침없이 삶을 개척하며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초자아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감을 확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이는 부모의 존재로부터 독립한 존재가 된다. pp9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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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초자아의 사랑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부모나 사회의 대리자이지만, 어떤 결함도 없는 기계적 대리자이므로 외부에 있는 어느 누구의 명령보다 더욱 기계적이고 엄격한 방식으로 명령하고 처벌한다. 프로이트는 초자아의 덫에 걸리게 되면 자아는 자기징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죄책감을 느낀 자아가 더 많이 포기하면 할수록 이드로부터의 자극은 더 강해지고, 그렇게 되면 이를 다시 초자아가 감지하여 자아를 더욱 다그치게 되며 자아는 더 큰 죄인이 된다. 더 많이 포기하면 오히려 죄책감이 더욱 커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아를 비난하는 초자아의 목소리는 청소년들이 지침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 아니라,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서 버티어 겨루어야 할 장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성숙함이란 충동의 혼돈에 빠지지도, 또 초자아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도 않는 중도의 길을 뜻한다. p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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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아는 부모의 목소리가 기계화된 버전으로 부모의 명령에서 부모를 제한 상태, 즉 목소리 자체에서 인간을 빼고 그것을 기계화한 결정체다. 그 목소리는 동일시를 통해 정신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삼엄한 경계 태세로 자아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 이 경우 지나친 억압에 의해 균형이 더 심각하게 깨지며, 초자아는 더욱더 가혹해진다. 초자아의 가혹함은 자아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p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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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란 충동이라는 혼돈이 존재하는 비조직화된 영역이며 자아는 이드의 외면이 외부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사화회된 표피를 지칭한다. 그것은 이드와는 달리 조직화되어 있다. 즉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자아는 외부와 함께 살아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조직이기도 하다. 부모나 양육자의 이미지를 동화하여 마음속에 그 자리를 내어주면, 즉 아이의 자아가 그들의 자아와 동일시를 이루면, 아이에게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상들이 내부로 유입된다. 외부인지 내부인지 가늠되지 않는 영아 상태에서의 외부는 이상적 자아라 부를 수 있으며, 그것을 외부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이상적인 타인의 상은 자아 이상으로 명명된다. 아이가 동일시한 자아 이상은 내부에서 규칙으로 자리 잡으며 초자아라는 영역을 완성한다. 이드가 "어떤 통합된 의지"도 없는 혼돈 그 자체인 영역이라면 초자아는 지나치게 가혹한 의지로써 불가능한 통합을 지시하는 영역이다. 자아는 이 두 영역 사이에서 충동의 혼돈으로 빠져서도 안 되며 가혹한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해서도 안 된다. 성숙이란 자아가 이 두 영역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아의 균형을 유지하는 상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초자아의 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되며 그보다는 "환자의 자아가 자유로워지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자아가 자율성을 획득하는 순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정보를 종합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성숙한 주체가 탄생한다.
프로이트는 충동적 이드와 가학적 초자아 사이에서 자아의 홀로서기를 돕는 주된 동력이 에로스라고 설명한다. 결국 삶의 근본적인 투쟁은 에로스와 죽음 충동 사이에서 일어나며 이 싸움에서 에로스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가 6년 후 집필하는 '문화 속의 불쾌'에서도 전쟁과 범죄, 공격성과 파괴성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그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영원한 에로스"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로스는 이드의 충동에 방향을 제시하여 충동에 목표를 부여하고 승화를 통해 충동의 대상을 변화시킨다. 내부 에너지의 총합은 이전과 같지만, 특정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목표 지향적 에너지는 혼돈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자아라는 그릇 속에 담기는 수많은 형상들과 사연들로 삶의 이야기가 쓰이는 것이다. pp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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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자율성이 시작되는 지점은 부모의 손을 놓는 순간이다.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이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며, 세상의 구석구석을 만질 수 있게 된다. 한 손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만큼 세상과의 소통이 제한된다. 사실 두 손이 자유로워질 때 그는 오히려 부모를 더욱 잘 돌볼 수 있다. 그가 독립된 성인이기 때문이다. 한 방향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결합이라면 그들은 네 손으로 세상을 어루만질 것이다. 두 개의 뇌, 네 개의 손, 네 개의 다리로 그들은 새로운 삶을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이다. 다시, 그 끝은 휴머니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게 되기 때문이다. p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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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사랑 역시 동일시를 통해 설명한다. 자아의 한 부분이 된 타인들은 우리의 의식이 그 존재를 잊고 살 때조차 언제나 무의식의 저편에 각인되어 있으며, 어느 순간 마치 외부에서 나타난 듯 우리 눈앞에 되살아난다. 이유 없이 하게 되는 행동들,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대상들은 그 대상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삶의 초기에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자아가 어떤 상들을 담게 되었는가는 이처럼 훗날의 선택을 결정한다. 프로이트는 하놀트가 그 부조를 우연히 만나 부조 자체의 매력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미 자아의 그릇에 담겨 있던 상이 그것과 닮은 세상의 세부에 덮어 씌워져 부활한 것이라고 맗나다. 그는 어린 시절 단짝이던 소녀를 잊고 살아갔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 있는 소녀의 상은 그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조이의 경우, 그녀의 의식은 아버지의 무심함에 치를 떨고 있지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 동일한 무심함을 보여온 남성을 선택한다.
프로이트는 하놀트가 조이라는 사랑의 대상에게서 온 힘을 다해 도망치다 멈추어 선 바로 그 지점에서 조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바로 그것이 무의식적 동기가 의식을 뚫고 드러나는 필연적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명언을 덧붙인다. 피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피하는 그 대상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내가 회피하는 바로 그 대상을 대면하고, 회피의 과정을 직면하며 이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pp13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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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이 시기에 아버지에게 거리감을 느끼는데,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며 그의 삶에 들어온 사람은 사촌형 마이크다. 마이크는 베트남전 참전용사이며 자주 라미네즈 앞에서 전쟁 중 그가 자행한 잔혹행위들을 자랑했다. (...)
사촌형과의 만남은 한 사람과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강간과 살인과 학살과 잔혹행위가 용인되는 듯 보이는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그러한 세상에서 이 일들은 범죄가 아닌 기념 또는 추억이었다. 그것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세상이었고, 라미레즈는 마이크를 통해 그 세상의 지옥을 마음의 그릇 속에 받아들였다. 그 세상에 살았던 마이크에게는 말다툼 후 아내를 죽이는 것은 범죄가 아니었다. (...) 라미레즈가 경험한 현실이 달랐다면, 마이크와의 만남은 외상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훗날 극복해야 하는 과거가 되었겠지만, 무덤에서 노숙을 하고 마약을 하고 절도로 생계를 연명하는 그의 현실은 결코 마이크가 보여준 과거의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살인자로 태어난 사람의 범행이라는 결론보다는 세상이 만든 과거의 지옥과 현재의 지옥을 모두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 한 사람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마이크는 세상이 만든 과거의 지옥을 대표하는 자다. 라미레즈가 마이크와 동일시했을 때 그는 과거의 지옥을 마음에 품게 된다. 나쁜 동일시에 의해 강렬하게 각인된 지옥의 풍경은 황량한 현재 속에서 증폭될 뿐이었고, 자아 속에는 그 축을 변경할 어떤 종류의 감정적 유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p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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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이 동일시 세미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은 '기표'다. 기표는 기호가 아니라는 말을 거듭 반복하며, 그는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대표하는 기호와 달리, 기표의 기능은 다른 기표를 위해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세미나의 시작이자 끝이다. (...)
아버지와의 동일시의 경우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수많은 우연들과 필연들 속에서 특정한 형상과 동일시를 이룬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실제 아버지의 형상일까? 물론 아버지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겠지만, 그 자체가 아버지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 어떤 동일시도 단순히 누군가를 동일시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외부의 대상과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동일시한 대상의 일부를 우리는 기표라 부를 수 있다. 즉 내가 가진 A라는 기표는 아버지의 A라는 모습을 동일시한 결과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보다는 아버지의 어떤 부분을 대표하는 A라는 기표가 나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특징을 대표하는 B라는 기표와 연결되는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동일시의 경우 A=A라는 공식이 적용될 수 없으며 그보다는 A=B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기표의 게임은 대상들의 관계 속에서 표면적 서사를 넘어 진행된다. (...)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동일시를 대상, 기표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욕망의 대상이 없다면 동일시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표들의 연계는 욕망의 대상이 움직이는 구체적 방식이다. 그 속에서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형성되며 동일시가 일어난다. 원하는 대상이 있어야 동일시의 과정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라캉의 설명은 사실 준비운동에 해당하는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에 근거하여 감정적 유대가 형성된다는 것으로서, 굳이 이 이론들을 숙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감정적 유대를 형성할 때 이미 우리는 내면에서 욕망의 대상을 찾은 후 그것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상태이기 대문이다. 라캉은 그 내면의 기재를 설명한다. pp24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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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감정적 유대가 욕망의 대상에 대한 갈구에서 시작된다는 라캉의 설명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를 묻는 프로이트의 고민이다. 그것은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좋은 동일시를 하고, 어떻게 부모들이 과잉 동일시를 강요하지 않고, 또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유익한 동일시의 형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민을 지속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전투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p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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