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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티벳 사자의 서 | 파드마 삼바바 — 가장 높은 차원의 심리학

by 릴라~ 2018. 9. 3.

 

 

 

파드마 삼바바가 말하는 죽은 자가 거치는 세 과정, 치카이 바르도, 초에니 바르도, 시다프 바르도의 이야기가 마냥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종교 경전을 읽는 것 같은 진지하고 경건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보니 티벳 사람들에게 사자의 서(바르도 퇴돌)은 경전이다. 정신세계사에서 발간한 '티벳 사자의 서'는 사자의 서 뿐 아니라 칼 융의 해설과 사자의 서를 맨 처음 서양에 알린 에반스 웬츠의 해설을 담고 있어 유익했다. 아래 내용은 칼 융의 해설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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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사자에게 나타나는 분노의 신들뿐만 아니라 평화의 신들조차 인간 정신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지성을 가진 현대인이라면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들이 생각의 투영물이라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동시에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는 현대인들은 매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는 바로 그렇게 하고 있다. (...)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티벳 사자의 서'의 특징은, 그 속에 담긴 모든 형이상학적인 주장들이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는 다양한 수준이 있으며, 그 수준마다 질적인 차이가 있고, 그 차이에 따라 그 존재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p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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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자의 서'는 가장 차원 높은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철학과 신학이란 아직도 중세시대적인, 심리학 이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단지 주장을 하고, 설명을 하고, 방어하고, 비평하고, 논쟁하는 게 고작일 뿐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그 '마음' 자체에 대해서는 토론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그것이 모두의 은밀한 합의 사항인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든 종교든 모든 형이상학적인 주장들은 '인간의 정신이 하는 말'이고, 따라서 심리학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는 모든 주장은 ㄱ의 마음의 표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전혀 새로울 게 없는, 너무도 명백한 진리가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한편에서는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모독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라고 항의할 것이다. 

 

현대인은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단지 심리적인 현상에 관한 것'이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혼soul'이란 실로 하찮고, 무가치하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덤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혼이라는 단어를 기피하고 그 대신 '정신mind'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주관적인 발언들까지 '정신'에서 나온, 다시 말해 '보편적인 정신', 심지어 다급한 경우에는 절대적인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까지 가장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다소 우스꽝스러운 가장은 어쩌면 영혼을 축소시킨 자신들의 후회스런 행위에 대한 보상 심리일지도 모른다. pp16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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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들어라. 이제 그대는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투명한 빛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으라. 아, 고괴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이다.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다르마카야(법신)의 상태이며 완전한 깨달음이다. 이것을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면, 모든 생각들을 창조해 내는 근원에는 참된 의식이 있으며,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텅 빔(공)은 모든 생각과 모든 설명을 초월한 경지이다. 하지만 그것은 낱낱의 사물들로 모습을 나타낼 만큼 생명력으로 충만한 것이며, 그 텅 빈 충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는 깃들어 있다.

 

경전은 이어진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바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다."

 

영혼은, 곧 여기서 말하는 그대 자신의 마음은, 확실히 작은 것이 아니라 눈부신 빛으로 가득한 하느님 자신이다.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주장은 지극히 신성모독적인 발언이고,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위험한 발언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어떤 서양인들은 이런 주장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과장된 신지학을 만들어 버린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런 가르침들에 대해 언제나 그릇된 태도를 갖고 있다. 어떤 것이 우리 앞에 있을 때 우리는 늘 그것을 현실에 이용하려고 하고 무엇인가에 써먹으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걸핏하면 저지르는 오류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충동을 자제할 정도로 우리 자신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이와 같은 가르침들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는 데 성공할 것이고, 아니면 적어도 '티벳 사자의 서'의 위대성을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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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자의 서'는 죽은 사람에게 최고의 궁극적인 진리를 설명해준다. 그 진리란, 신들조차도 우리들 자신의 영혼에서 비치는 빛이고 우리들 영혼에서 투영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동양인에게는 그렇다고 해서 태양이 빛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마치 자신의 하느님을 빼앗겨 버린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의 영혼이 곧 하느님의 빛이고, 하느님이 곧 그의 영혼이다. (...)

 

'티벳 사자의 서'는 사자에게 분명하게 밝혀준다. 영혼(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이 모든 것의 근원 자리임을. 이는 매우 사려 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분명히 해 주지 않는 하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밀쳐대고 억누르는 수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누구에 의해서 '주어진' 것인지 궁금해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사자는 바로 이 '주어진' 것들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하며 '티벳 사자의 서'의 목적도 이런 자유의 길로 그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사자의 입장에 둔다면 우리는 '티벳 사자의 서'로부터 결코 적지 않은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 첫 문장부터 모든 '주어진' 것들의 '주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해 낸 장본인이고, 모든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더없이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증거가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를 잘 알지 못한다. 마치 그런 앎은 존재의 목적을 확실히 이해하고자 하는 명상가들만의 몫으로만 여긴다. (...)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의 경우에, 세상을 자신의 마음이 창조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관점의 대전환이 필요하며, 여기에는 많은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모든 것들을 일어나게 했다고 믿는 것보다는, 모든 것들이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직접적이고 더 확신이 가는 일이다.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능은 환경의 창조자로서 자신을 보기를 거부하게 만든다. (...)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산 자의 입문식에 있어서 초월이란 죽음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사고와 관점의 대전환을 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음의 초월이고, 기독교 용어를 빌리자면 죄악과 세속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구원이란 과거의 무의식과 어둠(무지)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깨달음과 자유의 상태로 인도되는 것이며, '주어진'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고 승리하는 것이다.

 

이렇듯 '티벳 사자의 서'는 영혼이 태어나면서부터 잃어버렸던 신성을 되찾게 해주는 하나의 입문 과정이다. pp16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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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그 본질에 있어서 '티벳 사자의 서'의 가장 낮은 단계인 시드파 바르도의 경험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다시 말해 성적인 환상들과, 불안이나 그 밖의 감정적인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모순된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프로이트의 학설은 탄트라 불교의 시드파 바르도에 해당하는 인간 의식의 영역을 아래에서부터, 즉 동물적 본능의 영역으로부터 연구한, 서양에서 행해진 최초의 시도였다. 프로이트는 형이상학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신비의 영역 안으로는 파고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p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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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화의 대이동설보다는 차라리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걸쳐 인간이 근본적으로 비슷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사실 원형을 이루는 상상력들은 아무런 직접 전달이 없이도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들은 눈에 보이는 육체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들보다 한층 더 일정한 형태를 갖고 있다. p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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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시드파 상태에서 초에니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표면의식의 마음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안정된 자아(작은 나)를 희생시키는 일이고, 환영들이 난동을 부리는 것 같은 더없이 불안정한 세계에 자신을 내맡기는 일이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설명하면서 '불안의 진정한 자리'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실로 깊은 통찰력에서 나온 더없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자아 속에 깊숙히 수어 있으며, 그 두려움은 아슬아슬하게 통제된 무의식의 힘들이 언제 제멋대로 폭발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자신의 자아(개체성)를 움켜쥐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 위험한 길을 비켜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그것 역시 전체 자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 자아란 정신의 '우성 인자'들이 지배하는 동물계나 잡신들의 세계를 말한다. 인간의 자아는 원래 굉장한 노력을 들여 이들 세계로부터 탈출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어느 정도의 자유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완전히 탈출한 것은 아니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탈출했을 뿐이다.

 

그 탈출은 분명 매우 필요하고 영웅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탈출이 결코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나'를 창조한 것일 뿐이다. 이 '나'는 스스로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상'과 만나야만 한다. 세상이 바로 그 대상이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세상으로 보이지만, 사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마음이 투영해 낸 대상들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우리는 힘든 일들을 찾아 발견하고, 이곳에서 우리의 적을 찾아 발견하고, 또한 이곳에서 우리에게 귀중하고 소중한 것을 찾아 발견한다. 그리고 모든 악과 모든 선이 저 바깥의 세계에서,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대상들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하나의 위안을 준다. 그 바깥 세계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정복하고 응징하고 파괴하고 때로는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 자체는 이런 천진난만한 낙원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나'는 유한한 것이며 죽음이 곧 눈앞에 닥쳐온다. 이 세상은, 그리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의 상징이며 우리들 자신의 반영이라고 본 사람들이 역사 속에는 언제나 있어 왔고 또한 현재에도 있다. 티벳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초에니 상태가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심오한 통찰력으로부터다. 그 때문에 초에니 바르도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라는 뜻을 갖고 있다. pp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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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은 독자라면 이 몇 가지 힌트를 통해 '티벳 사자의 서'의 심리학에 대해 웬만큼 눈치 챘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책은 진리 세계로의 입문 과정을 거꾸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영혼이 다시 육체로 내려오는 과정을 준비해주기 위한 것이다. (...)

 

어쨌든 내가 여기서 설명한 일련의 사건들은 현대인들이 무의식의 '입문 과정'을 겪을 때, 다시 말해 무의식 분석을 받을 때 경험하는 사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p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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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세계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체험은 바르도의 맨 마지막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순간, 곧 죽음의 순간에 찾아온다. 그 다음부터는 점점 깊어지는 환영과 어둠 속으로의 추락이 있을 뿐이고, 마침내는 새로운 육체로 환생을 하기에 이른다. (...)

 

바르도 체험은 사자에게 영원한 보상이나 징벌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다만 새로운 육체의 삶으로 끌고 내려갈 뿐이다. 이 새로운 삶은 그가 궁극적 목적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지상의 삶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힘들게 노력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최후의 열매다. '티벳 사자의 서'의 이런 시각은 고상할 뿐 아니라 또한 대담하고 영웅적이다. p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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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 전체가 인간이 가진 무의식의 원형들로부터 창조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물질적이든 영적이든 실체를 가진 것들이 아니다. 하나의 정신 현상일 뿐이고 정신적 체험의 자료일 뿐이다. 이 점에서는 우리 서양인들의 이성적 판단이 꽤 정확하다. 그러나 어떤 것이 주관적으로 존재하든 객관적으로 존재하든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티벳 사자의 서'는 바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pp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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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과 영들의 세계는 사실 내 안에 있는 '집단무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문장을 뒤집어 읽으면 다음과 같다. "집단무의식이 곧 신들과 영들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어떤 지적인 곡예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인간의 전생애, 어쩌면 완성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무수히 많은 생들이 있을 뿐이다." p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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