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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신화의 힘/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by 릴라~ 2018.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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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저도 그 이미지를 소중히 여깁니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떠나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경우에도 끈질기게 지니게 되는 어떤 곳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사랑의 이미지요. 사람이 사람들을 처음 발견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왜 당신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캠벨/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 난쟁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p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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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어스/ 선생님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고는 인간 사이에 있는 공통점이 신화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이해했스니다.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 기나긴 삶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영원을 접하고, 신비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합니다. 


캠벨/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기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모이어스/ 그러니까 신화가 그 실마리라는 것이지요?


캠벨/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그 영적 잠재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 우리가 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까? 


캠벨/ 그렇지요.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경험'으로 바꾸었는데요?


캠벨/ '삶의 경험'이라고 하기로 합시다. 마음은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답니다. 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선 이야기에는 꽃과 관련된 석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석가는 그저 꽃 한 송이를 쳐듭니다. 그런데 좌중에 딱 한 사람이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석가를 향해 웃어보입니다. 석가라는 분 자신은 '이렇게해서 오신 분(여래)'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는 의미가 없어요.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니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을 어떻게 경험하실 수 있었습니까?


캠벨/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자, 결혼을 예로 들어볼까요? 결혼이 뭐지요? 신화는 결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


감히 말합니다만,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고나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중국에서 '도'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p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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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캠벨/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모이어스/ 사회가 강력한 신화를 포용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캠벨/ 지금 우리가 처한 것 같은 사태가 나지요. 의례가 없는 사회가 어떤지 알고 싶으면 '뉴욕타임스'를 보세요.


모이어스/ '뉴욕타임스'가 어떻길래요?


캠벨/ 뉴스를 한번 보시라는 겁니다. 문명화한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자행하는 파괴적이고 범죄적인 행위도 뉴스로 등장해 있을 겁니다. 


모이어스/ 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레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사실입니다.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


캠벨/ 바로 그겁니다. 사춘기 의례가 필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원시 사회에서는 이빨을 쪼아낸다거나 몸에 상처를 낸다거나 할례를 베풀거나 하는 사춘기 의례가 있었어요. 이러한 의례를 거치면 어린이의 몸은 더 이상 어린이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pp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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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어스/ 하지만 신화라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의 꿈이 아닙니까?


캠벨/ 아닙니다, 아니에요.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러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모이어스/ 한 인간이 전설이 되는 것은 어떻습니까? 가령 존 웨인은 신화가 되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캠벨/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p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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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 문제의 해답도 신화에서 배웠어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빛을 내는 전구인가, 전구가 수레가 되어 실어 나르는 빛인가.... 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퍼가 내려앉고, 다음에는 타이어...... 그런 식으로 하나 하나씩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예측이 가능해요.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아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p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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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어스/ 그러니 예술가가 바로 오늘날에 신화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까?


캠벨/ 옛날에 신화를 쓴 사람들은 오늘날의 예술가들에 대응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모이어스/ 동굴 벽에 그림도 그리고, 의례를 집전하기도 해으니 그렇겠군요?


캠벨/ 그렇지요. 독일에는 상당히 로맨틱한 데가 있는 묵은 표현이 있습니다. '다스 폴크 디히테트'라는 건데, 이것은 전통 문화의 관념과 시는 모두 민중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전통 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이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 작용을 하는 겁니다.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p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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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어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캠벨/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가 아닙니다.


모이어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를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p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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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처방에 영험이 있었던 것 같군요.


모이어스/ 우리도 그 진리를 알 수 있을까요? 그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캠벨/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깊이와 경험과, '사트, 취트, 아난다'와 관련된 존재의 확신과, 의식과 천복을 통한 나름의 존재 방식이 있어요. 종교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보기까지는 끝내 천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나는, 살아 있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곧 천복이라고 생각해요.


모이어스/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캠벨/ 천국에서는, 하느님으리 우러러보는, 생전 안 하던 경험을 하니 대단하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이어스/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 순간에, 혹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에게는 그럴 때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캠벨/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러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


모이어스/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캠벨/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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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어스/ 신화에는 왜 그렇게 영웅 이야기가 많습니까?


캠벨/ 많은 가치가 있으니까요. 심지어는 대중소설에서도 남자든 여자든, 주인공은 보통 사람의 성취와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거나 이루어낸 영웅입니다.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모이어스/ 그래서, 어떻게 각색되었건 행적이 어떻건 간에, 모든 문화권에는 영웅이 있는 것이군요.


캠벨/ 그렇지요. 사람의 생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모험의 구조와, 모험이 지니는 영적인 요소는 태고의 성인식에서 충분히 예고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성인식을 통하여 아이는 아이의 시절을 포기하고 어른이 되기를, 혹은 유아기의 인격과 정신을 버리고 책임 있는 어른이 되기를 강요당하지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과정이며 정신적인 변모 과정입니다. p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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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파이오니아(개척자)들에 대해서 이런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그러면 자기 손으로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서구식 개인주의는 이런 낭만적인 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캠벨/ 그렇고 말고요. 동양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종류의 개인주의를 읽을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게 사회적 시스템이 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게 서구 사회에서는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모이어스/ 자기 경험을 지혜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느낌의 경험에서 우러난 사랑이 그렇다는 뜻입니까?


캠벨/ 그럼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p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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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p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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