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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나는 종종 오션비치에 가곤 했다. 도시 끝자락의 출렁이는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는 그 긴 모래 해변에서 나는 다시 힘을 얻었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관점이란 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하다. 도시가 모래로 바뀌고, 모래는 파도로 바뀌고, 파도는 대양으로 바뀐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대양이 수천 마일이나 이어지고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의 이야기, 아니 사람들의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경계가 있음을, 그 너머에는 다른 어떤 것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미지의 끄트머리가 그렇게 익숙한 모습으로, 영원히 해변을 적시고 있다.
학생들에게 본인을 계속 지탱해 줄 장소를 찾기 시작해야 할 나이라고 이야기했다. 장소가 사람보다 더 믿을 만하고, 가끔은 사람보다 더 오래 관계가 유지되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본인이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가 어디인지 물었다. 학생들이 대답했다. 한 명 한 명, 뒷줄 끝에 앉은 학생까지, 한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에서도 오래 머무른 적이 없고, 정든 곳을 남겨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민자, 평생을 지낸 집을 처음으로 떠나야 했던 10대, 익숙한 풍경을 사랑했고 또 그리워하는 학생도 있었고, 아직 그런 풍경을 찾지 못한 학생도 있었다.
나는 친구나 스승을 발견하기 전에 책과 장소를 먼저 발견했고, 사람이 주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들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pp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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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위험하다.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모두 그러하다. 파괴하는 이, 큰 고통을 일으키는 이는 먼저 자신의 일부를 죽여 없애거나,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볼 수 없게 된다. 그의 내적 풍경은 칸막이와 동굴, 지뢰밭과 공토, 함정 같은 것이 가득한, 스스로에게 등을 돌리는 풍경, 자신을 알지 못하는 풍경, 본인도 길을 잃어버리는 풍경이다. 이런 상황은 전쟁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죽임이라는 실재, 뜨끈하고 엉망이 된, 고통스럽게 절단된 인간의 몸과 피와 절규, 살아남은 자의 상실감 같은 것은 부수적 피해라는 말로 추상화되거나 완전히 무시된다. 그런 상황에서 적은 인간이 아닌 무엇으로 재규정된다.
이는 일상생활의 작은 행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본인이 완벽하게 정당하다고 느끼는 사람, 자신이 해를 끼쳤음을 모르는 사람, 본인만 모르고 다른 사람은 다 아는 의도가 담긴 어떤 말을 하는 사람, 늘 복잡한 이유를 들이대거나 그저 잘 까먹는 사람. 우리는 모두 한때 그런 사람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건 살인자의 정신 상태이며, 크게 보면 전쟁에 임하는 정신 상태다. p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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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성지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지휘소다. 이 고요한 방들에 크레이지 호스와 아웅산 수치의 삶이 있고, 백년전쟁과 아편전쟁을 포함한 추악한 전쟁이 있고, 시몬 베유와 노자의 사상이 있으며, 당신이 탈 배를 만드는 법과 결혼 생활을 잘 끝내는 법이 있고, 독자들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무장시켜 주는 허구의 세계와 책들이 있다. 도서관은 이상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지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저장되어 기억되고 삶을 되찾는 장소, 종이가 가득한 상자에 세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곳이다. 책 한 권 한 권이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며, 어린이 책에서 말하는 마법이라는 것도 그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 도서관은 세상으로 가득 찬 은하수다. 모든 독자는 우다오쯔이며, 상상력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책은 독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풍경이다.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들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p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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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 이번 모험은 두 손으로 덥석 받을 많은 이유가 있었다. 마치 책이 하나의 문이 된 듯했다. 사람들이 책을 통해 들어와 내 삶에 발을 들이고 나를 그들의 삶으로 이끈다.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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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그 사람 혹은 그런 사람들은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그런 감정이입이 차단될 수도 있다. 사회 전체가 자신은 경계에 있는 소수자들과 무관하다고 여길 만큼 무감각해지도록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마치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맺은 인간적 관계를 지워버리는 사람들이 있듯이 말이다.
감정이입 덕분에 당신은 고문, 배고픔, 상실의 느낌을 상상할 수 있다.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다음엔 마치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반응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신체적 고통이 자아의 신체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잇다. 그리고 이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은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 가고, 가장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다. p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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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empathy)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감정이입은 시각예술에도 조예가 깊던 한 심리학자가 만들어 낸 용어다.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데, 1909년 에드워드 티치터가 처음 제안하기 전까지는 '공감', '친절함', '안쓰러워함', '동정', '동질감' 같은 단어가 그 일반적인 의미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독일어로는 'Einfuhlung'으로 번역되는데, 마치 감정 자체가 다가가는 것처럼 '들어가 느끼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path'인데, 그리스어로 열정이나 괴로움을 뜻한다. 비애, 병리학, 동정 같은 단어의 어원이 모두 같다. 감정이입이 '오솔길'을 듯하는 고대 영어 단어 'path'와 동음이의어를 어원으로 가지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다. 엘린이 만든 어두운 미로의 제목이 '진로'였던 것도 마찬가지다. 감정이입은 당신이 무언가에 관심을 기을일 때, 그것을 보살피며 그곳에 가보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 나서는 여정이다. 눈앞에서 괴로움을 직접 목격할 때도 그 사람이 관절에 끔직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최근에 집을 잃어 버렸는지를 알고 싶다면 말이 필요하다. 머나먼 곳의 괴로움은 예술 작품을 통해, 이미지나 음성 기록, 아니면 이야기들을 통해 당신애ㅔ게 와 닿는다. 그런 정보들이 당신을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들을 만난다면, 그 만남은 여정의 중간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p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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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나 상실에 관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만드는 일에는 즐거움이 따른다. 사물의 삶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 만족감 중 가장 과소평가되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즐거움이다. p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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