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일본 인텔리겐차들에게 마르크스는 필독서였다고 한다. 정치, 경제는 물론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와 정반대의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조차 자신이 왜 마르크스를 거부하는지 밝혀야 할 만큼.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 나중에 자민당원이 되거나 천황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지만, 이후의 행로가 어떠하든 청년기의 '통과의례'로 마르크스를 읽었다고 한다. 저자 또한 마르크스를 통과한 세대다.
청년들이 더이상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 된 시점은 일본의 거품경제가 시작되고 경제적 풍요가 보편화된 때라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청년들이 마르크스를 통과하지 않게 되면서, 양심이나 사회적 정의, 인간적 품위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를 읽은 세대는 사회에 나오면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기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열한가를 깨닫게 되고, 그런 인간을 용서하는 법도 배우게 되는데, 이 또한 아주 귀중한 앎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반면 오늘날 청년들은 돈과 지위를 숭상하면서 능력 있는 인간이 우아하게 살고 무능한 인간이 경멸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이를 '자기 책임'이라 여기고 '사회 정의'라 여기는 사고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민과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놀랍고 명쾌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 학생들의 획일적 사고방식에 놀랄 때가 많은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하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이라는 것을. 꼭 마르크스일 필요는 없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도 '마르크스 읽기'처럼 청년들을 다음 단계로 성숙하게 하는 그런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교육적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현실을 외국 이론을 가져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서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정확히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저자의 책은 언제나 반갑다. 일본의 현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서양의 책보다 훨씬 공감하는 바가 크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나도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
'프롤레티라아'는 독일어로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생활하는 임금 노동자'라는 뜻이에요. 원래는 고대 로마의 최하층 계급(정치적 권리가 없고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으며 그저 아이를 낳는 것이 일인 무산자)을 가리켰지요. 마르크스주의 정치 용어로서는 노동자 개인을 가리킬 때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계급 전체를 지칭할 때는 '프롤레타리아트'라고 구분해서 씁니다.
이렇게 용어를 해설해놓으니까 문제가 확실해진 것 같아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노동자'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채택하지 않고 역사적인 용어인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를 굳이 골라서 제시한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고유한 함의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프롤레타리아'는 그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노동자"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들은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낱말의 정의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동어 반복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문장 자체에는 현상을 지적한다든가 분석한다든가 해명하는 기능은 없어요.
그 대신 박력이 있지요. 박력이 아주 차고 넘칩니다.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순간, 프롤레타리아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란 '족쇄를 끊는 것'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세계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장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멋들어진 문장 아닌가요? 우리 세대에서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는다고 하면 '공산당 선언'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들은 세계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대목에서 모두들 가슴이 쿵쿵 뛰곤 했죠.
'세계를 획득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잘 다가오지는 않죠? 하지만 뭔가 가슴속을 뭉클하게 파고드는 듯, 정신을 한껏 고양시키는 듯, 마치 꼭 시의 한 구절 같지 않은가요? pp48-49
##
자, 이제 드디어 마지막 문장.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훌륭하기 짝이 없는 맺음말이죠.
내 생각에는 '결기하라'도, '타도하라'도, '탈환하라'도 아니고, '단결하라'고 한 점이 참 훌륭합니다. '결기'나 '타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하 조직을 결성하거나 무기를 입수하는 등 품과 시간이 꽤 들 것이고, 무엇보다도 비폭력적인 사람에게는 먹히기 어려운 말이겠지요. 하지만 '단결'이라면 이 책을 덮는 순간부터 가능한 일이에요. 곁에 있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손을 내밀어 '우리 힘을 냅시다!' 하면 그만이니까.
'세계를 획득한다'는 거대한(대체로 환상적인) 목표를 위해 마르크스가 우선 제시한 것은 구체적이로 일상적인 '단결'이란 몸짓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지극히 전투적인 매니페스토의 마지막을 '우애'라는 말로 맺은 것입니다.
정의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한 싸움을 앞두고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서 '단결'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위대하다고 느껴요.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내걸고 '혁명' 투쟁을 전개했지요. 하지만 그들 '혁명가'의 매니페스토 대부분에는 마지막 맺음말에 그다지 따뜻함이 깃들어 있지 않아요.
참된 혁명의 선언은 '미움'이나 '파괴'를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우애'를 담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돼요. 이렇게 아주 인간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마르크스는 19~20세기에 출현한 무수한 혁명가들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pp52-53
##
마지막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젊었던 열 일곱 살 마르크스가 쓴 '직업의 선택에 관한 어느 청년의 고찰'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할까 해요.
"어떤 지위를 선택할 때 우리를 이끌어주어야 할 주요한 안내 요소는 인류의 행복이며 우리 자신의 완성이다. 이 양쪽의 이해관계가 적대적으로 충돌하게 되어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인간의 본성이란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의 완성을 위해, 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할 때에만 자기의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이것은 김나지움의 졸업 작품으로 쓴 글인데, 자신과 사회를 대립시켜서 파악하지 않고, '인류의 행복'과 '자신의 완성' 사이의 조화를 꾀하려고 하는 마르크스의 인생관이 이미 알기 쉽게 드러나 있어요. 이후 마르크스의 구체적인 사회론은 대대적으로 변화하지만, 여기에 드러난 인생관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이 글을 읽고 무척 감격했는데, 여러분은 어떤가요? pp78-79
##
근대 시민사회의 성원들은 '사인'과 '공민'이란 두 가지 모습으로 분열되어 있고, 사인의 모습이 본래적인 모스이라고 스스로도 굳게 믿고 있어요.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해요. "이봐, 그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이래라 저래라 하니까 할 수 없이 법률에 따를 수밖에' 하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류가 그렇게 피땀 흘리며 노력해왔단 말이야? 인간이 참으로 해방된다는 것이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어?"
나아가 마르크스가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한 인간이 공과 사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고, 분열된 모습 중에 '이기적인 쪽'이 진짜 모습이고 '비이기적=공명한 쪽'이 가짜 모습이라는 것도 이상할 뿐이야. 그게 아니라 참으로 해방된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할 것이 분명해.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인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마르크스는 그러한 인간을 '유적 존재'라고 불렀어요. 어쩐지 낯설게 들리는 이 '유적 존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유적 존재'란 '현실의 개체적 인간이 추상적인 공민을 자기 안에서 되찾은" 상태를 가리켜요. 시민사회에서는 '공사의 혼동'이 어디까지나 '공보다 사를 우선한다'는 것임에 비해, 유적 존재는 공과 사를 문자 그대로 일치시킨 상태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공사를 일치시키는 인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상하는 것 자체가 매우 곤란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마르크스는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나는 이런 사고방식(곤란한 목표이기는 한 것 같지만)이 옳다고 봅니다. 스스로도 부족하나마 될 수 있는 한 이런 방향으로 '유적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려고 해요(진심으로!).
##
또 하나는, 이제부터 읽어나가면 좋을 텐데요. 마르크스의 혁명론은 먼저 의회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권력을 세우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아 노자관계를 기본으로 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바꾸어나가자는 틀을 갖추고 있어요. 다시 말해 그것은 오늘날 회자되는 것처럼 '폭력 혁명'론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실은 마르크스가 '폭력 혁명'의 논자로서 유명세를 얻는 데 공헌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레닌이었어요. '국가와 혁명'이란 책이 그것이랍니다. 이러한 레닌의 논의를 한층 더 단순화시켜 보급한 사람이 스탈린이라고 하겠지요. 이러한 혁명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와 레닌 사이에 커다란 견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하나하나 짚어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리고 마르크스의 혁명론은 생산 관계의 전환을 기본으로 삼고, 그것을 통해 인간관계의 전환을 지향하려고 해요. 한마디로 '당신(자본가)과 나(노동자)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가?' 이것이 과제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서는 이래저래 버성기는 점이 생겨나니까 그런 점을 바꾸어나가자는 것이에요. 이를 위해 생산 수단의 소유 관계를 어떻게, 무슨 수를 써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저 놈만 쓰러뜨리면 세상은 바뀔 거야....' 라며 단순하게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에요. pp137-138
##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란 이런 사태를 가리켜요. 자신의 뼈를 깎아 만든 상품이(봉제공 소녀에게 궁정 무도회에서 귀부인이 휘감은 드레스가 그러한 것처럼) 자기한테는 대단히 소원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그뿐인가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소녀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체제의 수익자인 동시에 지지자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소외'의 구조예요. 노동은 "궁전을 만들지만 노동자에게는 움막을 지어준다. 노동은 아름다움을 창출하지만 노동자에게는 기형을 만들어준다"고 한 것은 레토릭이 아니었어요. 19세기 영국에서 '움막'은 문자 그대로 '움막'이고, '기형'은 말 그대로 '기형'이었으니까요.
앞의 편지에서도 썼다시피 마르크스의 윤리성은 이러한 자각이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어요. 마르크스 자신은 부르주아였으니 그가 인용한 가혹한 노동의 경험 같은 것은 안 해봤을 테지요. 하지만 강렬한 공감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시카와 선생이 연보를 훑어주었듯이 마르크스는 약관 24세에 '라인신문'의 주필을 맡아요. 그 뒤로도 꽤 가난한게 살지만 '움막'이나 '기형'을 경험한 적은 없지요. 절친한 친구 엥겔스는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성장했는데, 자기 집안의 면 공장을 경영하려고 맨체스트로 파견되었을 때 거기에서 영국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보고 경악하여 정치사상에 눈을 뜬 사람이에요. 엥겔스의 첫 저서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였는데, 이 책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해요.
"노동자 계급의 상태는 오늘날 모든 사회 운동의 참된 기초이자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사회적 비참함을 가장 최고로 드러내주는, 또한 가장 노골적인 정점이기 때문이다. "
보세요.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비참함'을 목도한 경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이렇게 윤리성이 높다는 점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풍상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을 때 '소외된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열의를 꼭 느꼈으면 좋겠군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화폐나 지대 같은 얘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마르크스가 지닌 인간적인 면은 그가 '소외된 노동자'를 생각할 때면 금방 흥분해버린다는 점이에요. 공평하지 않은 사회의 실상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것이죠. 한 사람의 청년이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부여잡고, 당시의 사상이나 학문을 섭렵하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전력을 다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사상'을 세워나가는 일, 그 속에 깔려 있는 절박한 심정을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공감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pp147-149
##
사회 제도를 바꾸거나 법률을 제정하거나 비인도적인 행위를 엄하게 처벌한다 해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이 사회는 불공평함을 막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합법적인 수탈의 방식을 궁리할 것이고 대의명분을 내세운 지배 방식을 발명해내겠지요.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좋아지지 않아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르크스는 이 점을 이렇게 생각햇어요.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유적 존재'를 지향하면 바뀐다." 이것이 제3초고의 제2장 '사적 재산과 코뮌주의'의 중심 논점이에요.pp150
##
마르크스는 그러한 인간의 성숙을 '사회적'이란 술어로 나타냅니다. 이 말은 '사'가 아니라 '공'에 중심축을 놓는 인간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보면 돼요. 인간은 사회적일 때 인간적이며, 인간적일 때 사회적이라는 이치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기술해요.
"나는 인간으로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든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사회를 위해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 내가 한 사람의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만든 것이다."
자기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은 사회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어요. '나를 위해 만드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고요.
젊은 시절 읽을 때는 몰랐었는데, '경철 수고'를 이번에 다시 읽고, '어이쿠, 마르크스가 이런 말까지 했구나' 하고 몰란 것은 유적 존재의 신체성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이었어요.
인간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이라는 말이겠지요. 이론적으로는 그래요. 이 말은 곧 자기가 생각한대로 행동하면 그것이 한 치도 틀림없이 사회 전체의 복리를 위한 규범이 된다는 말이니까요. 유적 존재, 즉 뛰어난 사회적인 인간에게는 개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사회적으로(즉 타자들과 함께) 보는 것이고, 개인의 귀로 듣는 소리는 타자들과 함께 듣는 음이며, 개인의 손가락으로 만진 것은 타자들과 함께 만진 것이 된다는 말이지요. 마르크스는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해요.
"타인의 감각이나 정신도 내 자신이 내 것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직접적인 기관 외에 사회적인 기관들이 사회라는 형태에 입각하여 형성된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과 직접 공동으로 수행하는 활동 등은 내 삶을 표출하는 하나의 기관이 되고 인간적인 삶을 내 것으로 삼는 방법의 하나가 된다." pp155-156
##
"유물론은 인간의 정신보다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식의 오해가 있는가 하면, "사적유물론은 역사에서 차지하는 인간 의식의 역할을 경시한다"고 보는 소박한 관점도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마르크스의 논의는 그 반대예요. 이를테면 '지금 이 사회 그대로가 좋지 않아?', '아니야,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기는 힘들어'처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의식이 같은 사회 내부에서 형성되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그리고 대립하는 의식의 역관계가 변화해가는 것은 - 그것이 실제의 사회 변화로 이어지는데요 - 어째서일까 등등, 인간 의식의 변화야말로 마르크스에게는 학문적 조명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pp168
##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만들어져야 할 상태도, 현실이 따라가야 할 '미래형'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폐기하는 현실적 운동이다. 이 운동의 제 조건은 지금 현존하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는 이상적인 나라(유토피아)라는, 제멋대로 그린 설계도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껴안고 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모습이 정해지는 결과라는 말이에요. 이 참신한 발상은 후대까지 마르크스의 혁명론이나 미래 사회론에서 중요한 기둥이 됩니다. 미래는 인간이 사회에 자유롭게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사회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러한 시각에서 나중에 엥겔스는 자신들의 학설을 '공상적 사회주의'와 구별하여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특징짓고 있습니다. pp180-181
##
또 하나 저한테 이 책(독일 이데올로기)이 매력적이었던 까닭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인간의 역사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자본주의 사회)과 격투를 벌이면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해내고자 전력투구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세랄까요, 또는 있는 힘을 다해 현실을 추구하려는 기백이랄까요, 그런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겨우 20대 중반일 뿐인 젊은이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에게 도전장을 내밀면서 '흥, 다들 별 수 없구만...' 하면서 훌쩍 뛰어넘으려고 했던 그 팔팔한 정신 앞에서는 앞도당하고 말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작업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논점이 때로는 팍팍 튀어버리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몇 번이나 같은 내용을 쓰고 또 쓰면서 생각을 밀고 나갔던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사물을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진정한 자세가 아닐까요. '선생님, 답을 가르쳐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아무도 아직 찾아내지 못한 답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지....'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탐구겠지요. 현실과 맞부딪치며 현실 속으로 성큼 들어가는 격투 말이에요. 저는 그러한 대범한 자세, 문제 앞에서 몇 번이나 좌절해도 굴하지 않는 강인함에 흥분을 느끼는 것입니다. pp202-203
sheshe.tistory.com/94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