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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사회, 과학

곤란한 성숙 | 우치다 타츠루 ㅡ 어른(=서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

by 릴라~ 2018.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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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로 끝날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떤 손해든 '없었던 일'로 원상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요. (...)

그렇기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법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동죄형법'이라고 불리는 이 규칙은 미개인이 고안해 낸 잔인한 법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어느 지점에서든 무한책임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에 법률로 '그 이상으로 책임을 소급해서는 안 된다'는 한도를 정해놓은 것입니다. 

눈을 찔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이 상대의 눈을 찌를 권리를 가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눈을 찔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이 상대의 눈을 찌르는 그 이상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복수의 권리 행사를 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

동죄형법은 '책임지는 일의 불가능성'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거기에 상응하는 어떠한 폭력으로도, 아무리 많은 재화를 지불하는 배상으로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레비나스는 '곤란한 자유'에서 '상처에서는 영원히 피가 흐른다'는 말을 적은 바 있습니다. p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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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의 목적은 '돈벌이'가 아닙니다. '인간의 성숙'입니다. 원활하게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통의 언어가 필요하고, 공통의 도량형이 필요하고, 공통의 상거래 관습이 필요하고, 신뢰와 약속 같은 덕목을 중요하게 여기는 윤리관이 필요하고, 교통망과 통신망의 정비도 필요하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 이것이 교역이 지닌 본래적 목적입니다. p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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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매일 유쾌하게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서부터 노동이고 어디서부터 유희인지, 확연하게 식별하는 것이 무척 곤란합니다. '일하기와 놀이' 사이에 경계선은 없습니다. (...)

유쾌하게 일하는 사람에게는 '온과 오프의 디지털적인 경계선' 따위는 없습니다. 일을 하고 있는지, 놀고 있는지, 당사자도 잘 모릅니다. 아마도 그런 삶의 방식이 '생물로서 살아가는 이치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노동과 유희의 구별이 가지 않는 상태'가 이상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일부러 절단하여 '노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힘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성실한 노동에는 '놀이'의 부분이 늘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좋지 앟을까요? 따라서 전혀 유희성이 없는 노동에 임하는 것(예컨대 갤리선의 노를 젓는 노예, 블랙기업에서 월 100시간 잔업에 시달리는 노동자 등)은 '생물로서 살아가는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놀이의 요소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는' 일은 '노동'이 아닙니다. 단순한 '고역'입니다. 되도록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pp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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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인간만이 노동하는 이유는, 인간이 소비하는 양이 자연환경이 주는 증여의 양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석기시대까지는 자생 바나나를 따거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산과 들에서 짐승을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식생활의 자원이 충분했습니다. 수렵과 채취와 어로는 '노동'이라고 할 만큼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루에 아주 적은 시간만 그런 활동에 할애했습니다. (...)

노동은 소비와 상관이 있습니다. 반대가 아닙니다. 소비량이 늘어나고 소비하는 품목이 늘어나면 그만큼 노동시간과 노동의 종류도 늘어납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자연의 증여로 꾸려 나갈 수 있다면 인간은 노동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노동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것은 소비의 양과 질입니다. 

'있는 것'을 주워 모으는 것만으로는 식생활의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p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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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산하는 일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통제당하는 일에 지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는 점점 더 노동 강화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 시간의 절대량이 증가했다기보다는 도리어 '생산에서 통제로' 이동한 효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p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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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좁은 집단 내부에서 유한한 자원을 서로 빼앗으려는 약육강식의 경쟁이야말로 진짜 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면, 삶에 대한 지혜와 힘의 발달을 어떻게 방해할까를 둘러싸고 모두가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서로 쥐어뜯기'에서 승리하면 확실히 일시적으로는 '상품'이 손 안에 들어옵니다. 

이제 슬슬 깨달을 때도 되었다고 봅니다만, '자신을 제외한 집단 구성원이 우둔하고 무능할수록 자신의 이익이 증대한다는 규칙'으로 구성된 조직은 차츰차츰 전체적으로 '우둔하고 무능한 집단'이 되어갑니다. 승자의 손에 들어간 '상품'은 점점 줄어들고 초라해집니다. 사람들이 더욱 거세게 서로를 무능하고 우둔하게 만드는 경쟁에 달려든 결과, 조직은 한층 더 빈약해지고 '상품'은 점점 싸구려가 되다가 마침내 없어집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면 '집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의 구성원은 지금 그러한 '집단의 약체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폐쇄 집단의 내부에서 서로의 능력을 떨어뜨리고, 서로의 에너지를 헛되이 소진하고, 서로의 의욕을 말살하는 동안 집단 자체가 살아남을 힘은 점점 약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니다. 그것은 숲에서 사바나로 서식지를 옮긴 개코원숭이보다도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개코원숭이들도 자기들을 잡아먹는 '외적'과 싸울 때에는 동료들의 전투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기를 간절하게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바라지조차 않게 되었습니다. 실로 개코원숭이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p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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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직이라야 조직구성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 향상시킬 수 있는 걸까요? 이것이 바로 조직론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나는 어떤 국가 형태가 바람직한 것인지 이상적인 국가상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국가의 조직론이 '몯느 사람이 기분 좋게 각자의 개성적인 재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집단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취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개혁'이나 '효율화'라는 용어로 항간에 널리 퍼져 있는 조직 재편의 기획 대다수는 단순히 관리 부문의 권한을 집중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놈들이 깃발을 휘날리는 '개혁'은 숙명적으로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p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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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젊은이들은 회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선택지는 몇 개쯤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소수의 '괜찮은 회사'를 찾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가'나 '번' 같은 회사입니다. 다만 가족적인 회사는 안 됩니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부성 원리, 남성 원리를 일관되게 작동시켜 전체의 전투력을 고양시키고자 고민하는 조직을 찾아야 합니다. (...)

앞서 '가족적인 회사'는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 그런 곳에서는 모두들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어깨를 두드리면서 큰소리로 '자, 라면을 먹고 나면 무보수로 잔업하자!'라고 하거나 '일요일은 과장님댁 이사를 도울 테니까 모두 아침 6시에 집합!' 운운합니다. (...)

두 번재는 스스로 회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도 젊을 때 회사를 만들었는데 참 괜찮은 일입니다. 스스로 규칙을 정할 수 있으니까요. 스스로 '이런 회사라면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회사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타이밍이나 운에 달려 있기도 하지만,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회사와 아예 관계를 맺지 않는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참 좋습니다. 농민, 나무꾼, 어부, 장인, 유행하는 예능인, 종교가, 무도가, 뮤지션, 소설가 등등...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갓 졸업한 신입 사원 일괄 채용' 같은 규칙에 얽매여 탈락이 곧 '인생의 막장'인 듯 깊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직업으로 가는 길은 무수하게 열려 있습니다. (...)

그런데 그런 곳에 대한 적절한 취업 정보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샐러리맨이 되는 길 말고도 무수한 직업이 있다'는 정보를 젊은이에게 알려주는 것은 기업의 인사에 지극히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보를 차단합니다. 이는 국책이기도 합니다. (...)

단 한 가지 곤란한 점이라면, 젊은이들의 임금이 지나치게 낮고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길어 소비활동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결혼과 출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국내시장이 위축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경영자들은 이렇게 주판을 튕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문제는 해외 시장을 확장하면 해결할 수 있다, 국내에 한정해서는 이미 시장으로서 매력이 없다, 긴 호흡으로 '차세대의 인재'를 육성한들 무슨 소용이랴, 필요한 인재는 동아시아에서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다.... 이렇게 말입니다. (...)

젊은이들이 이토록 불리한 고용 환경에 놓였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누구도 정답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직감을 믿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pp11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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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프로프라는 러시아의 학자가 있었습니다. 오래된 러시아의 민화를 채집하던 그는 민화에 전통적인 서사의 '구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2천 편에 달하는 민화를 조사한 결과, 그는 민화 전부가 동일한 구조의 변주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자, 서사의 맨 처음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아보니, 하나같이 '가족의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민화는 '가족의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악마에게 잡혀간다든가 벽 저편으로 사라진다든가 우물 속에 빠진다든가)에서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남은 가족들이 사라진 사람을 찾아 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왕님이 괴물에게 납치당했다, 그러자 왕이 비탄에 잠겼다'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당신이 잃은 것을 찾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선언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왕의 의뢰를 받아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선량한 마법사'를 만나 '마법의 도구'를 손에 넣거나 '고성능 이동 수단(말, 배, 독수리 등)'을 제공받고, 마지막으로 '나쁜 놈(용, 악한 마법사 등)'을 물리치고 '찾아 헤맨 것(공주, 보물, 비밀문서 등)을 탈환합니다.

이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민화에 공통적인 보편적 구조입니다. RPG의 스토리도 이와 동일합니다. 동일한 유형을 선호하는 까닭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 화형에 인류학적으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바로 '민화의 주인공처럼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어릴 적부터 이러한 유형의 민화를 듣고 자란 아이의 머리에는 이런 메시지가 새겨집니다. '서사의 주인공'(철학적으로 말하면 '주체', 이 책의 취지에 맞춘다면 '어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되고 싶다면 '무언가의 결여로 곤란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망설이지 말고 간청에 응하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

어떤 선택이 적절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언제나 '살아가는 힘'의 증감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살아가는 힘이 강해졌는지, 아니면 억눌려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사소한 바늘의 떨림과 같아 웬만큼 센서의 감도를 높이지 않으면 감지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신뢰성이 높은 판단 기준입니다. pp12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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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재능입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재능을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못한 인간을 향해 '넌 노력이 부족하니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해' 하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말입니다. (...)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노력해 볼 여지가 없는 일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업적을 통틀어 '노력의 성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전부라고까지는 못해도 거의 모든 업적을 '개인적인 노력의 성과'로 보는 규칙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것은 재능도 행운도 필요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능력주의, 성과주의'의 기본을 이루는 인간관입니다. 노력하기 위해서는 재능도 행운도 필요 없고, 노력에는 유전 형질도 운도 관계없기 때문에 노력의 성과는 온전히 노력한 본인이 취할 권리를 가질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감사할 필요도,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인간관에 의하면 내가 이만큼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내고 이처럼 좋은 학교에 진학해 좋은 지위를 얻은 것은 고스란히 자기 노력의 성과라고 봅니다. 0부터 시작해 온전히 100% 내 힘으로 이루어낸 성과이기 때문에 혼자서 배타적으로 점유하고 소비할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

오히려 '공부하고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는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행운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노력할 수 있는 것도 운'입니다. 선천적인 자질이 있거나 후천적인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 덕분에 노력할 수 있습니다. 노력이란 자기 결정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결정이 가능한 분도 있지만 전체가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점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pp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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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수탈당한 사람이 유일하고 정통한 탈환의 주체'라는 규칙을 채용하면, 이 세상에 정치 운동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지고지순의 '피해자'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너에게는 '사회적 부정을 시정하라'고 말할 자격은 없어. 너야말로 그 부정의 수혜자니까"라는 단정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논법으로 수많은 '혁명가'들은 사회 개혁의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부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를 한정하면 한정할수록 사회적 부정을 시정하는 운동은 위축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요.

비정규노동자는 '노동환경이 열악하다'고 힘껏 외치고 있지만, 일당 300엔을 받는 니카라과의 농장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귀족 같은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니까 호강에 겨운 말이잖아' 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비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심한 곤궁에 처해 괴롭다'고 누군가 말하면, 반드시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봐, 너보다 더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 비하면 너에게 요구할 권리 따위는 없어'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것이 탈환론의 본질적인 모순입니다. pp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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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는 자기를 기원으로 삼는 주체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증여는 그 자체가 이미 '증여를 받았다는 사실의 결과'입니다. 증여 경제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이 점에 관해 거의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여는 배부른 사람이나 아량이 넓은 사람, 박애주의자 등의 자유의지에 의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아, 증여를 받아 버렸네. 빨리 반대급부를 해야지...' 하고 느낀 사람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p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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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삼림, 하천, 대기 같은 자연 자원도, 철도, 통신, 전기, 가스, 수도 같은 사회적 인프라도, 학교, 병원, 사법제도, 행정기구 같은 제도 자본도 모조리 '당연히 있는 것이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아무런 감사도 하지 않고, 사회적 공통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자진해 힘을 기울일 마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시민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증여의 사이클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시민적인 성숙함을 이룩하지 못한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만 넘쳐납니다. 겉모습은 노인이라 해도, 아무리 경륜이 있는 체해도, '아이'는 '아이'일 뿐입니다. 어른이 점점 줄어들고 아이만 늘었기 때문에 증여의 사이클이 정체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증여의 싸이클을 움직여야 합니다. p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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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람들은 (주관적으로는) 좀 더 '크기가 크고 수명이 긴 생물'이었습니다. 친족공동체든, 지역공동체든, 학술공동체든, 정치결사든, 복수의 사람을 포함하고 복수의 세대를 가로지르는 '수명이 긴 생물'이었습니다. 개체로서 자기 자신은 언젠가 죽겠지만 앞선 사람을 '계승해' 나중 사람에게 '물려주는' 공동체의 삶과 죽음은 개인의 생사와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아이덴티티의 근거를 개인보다는 집합적 자아에 둔다면, 그 사람은 꽤 수명이 긴 생물로서 행동할 것입니다. 

근대 이전까지 사람은 수십 명, 수백 명의 동포와 더불어 집단적 자아를 형성해 '3세대, 어림잡아 100년'을 평균수명으로 삼는 생물이었습니다. 그런 생물의 관점에서 생존 전략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했던 것입니다. '가문을 욕보이지 말라'든가 '고향의 자랑거리'라든가 '민란' 같은 것은 단지 현실적으로 집단적 유대를 강화하려고 내걸었던 원리가 아닙니다. '크기가 큰 생물, 수명이 긴 생물'로서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라는 '척도'를 지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근대 이전에 비해 현대에 가장 변화한 점은 '주체'의 크기와 수명, 즉 일의 적절성 판단에 관여하는 도량형의 '기준' 자체입니다. (...)

사람들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계속하기에 이른 것은 딱히 인간들이 그만큼 사악해졌거나 우둔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평균 수명이 지극히 짧은 생물로 행동하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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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들리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라틴어는 '죽음의 표상', '죽음의 경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죽음의 신호'입니다. 

언제나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당분간 나는 죽지 않겠지' 하고 우쭐대고 살아갈 때보다 살아 있는 시간의 질이 높아집니다. 

한 가지 한 가지 경험의 의미가 깊어지고, 한 가지 한 가지 희열의 깊이나 두께가 늘어납니다. 살아 있다는 뜻이 지닌 폭과 깊이를 끝까지 맛보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p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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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느낀 것, 자신이 생각한 것을 발표할 때는 되도록 '자신이 죽으면 같은 것을 느끼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만 골라 선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발신하는 익명의 대다수는 이와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도 같은 것을 느끼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만 선택해 발신하고 있습니다. p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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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젊은이들에게 세계 대국으로서 열강과 발맞춘다는 역사적 사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앞가림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100% 자기 이익의 추구에 집중해주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어른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들은 이제 '청년'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구미와 일본, 구시대와 신시대 사이의 다리를 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애늙은이 같은 어린애'에서 그대로 '어린애 같은 아저씨'가 되는 코스를 밟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일본에는 '청년'이 없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변해 이렇게 천박한 나라에서는 살아남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지경까지 위기감이 팽배해 있습니다. 어쩌면 역사적 소명에 응해 '새로운 청년'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희미하게 그런 징조를 감지할 정도에 불과합니다. 

메이지시대(1868~1912)와 다이쇼시대(1912~1926)에 '청춘'이라는 말을 선호했던 까닭은 '청년'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청춘'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실로 절실하게 던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청년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지 않을까...' 라는 불안을 무의식중에 감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 좀 더 상세하게 청년을 정의해야 할 듯합니다. 청년이란 구시대와 신시대, 구미와 일본 사이에 다리를 놓을 뿐만 아니라 '어린애'와 '어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어린애 같은 풋풋함, 이상주의, 순진무구함,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어른들과 섞여 자기 나름대로 교섭하거나 실력을 발휘하는 사회적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청년'입니다. p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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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친다는 것은 공동체를 짊으질 '차세대'를 만들어내는 사업입니다. 그것은 가족도, 기업도, 지역공동체도, 국민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착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확인해 둡니다만, 교육의 수혜자는 '본인'이 아닙니다. 공동체 자체입니다. 따라서 '참견'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취미나 재미로 참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공동체가 살아남지 않으면 장래에 '자기 자신도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금방 동의해주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얻고, 호화로운 소비생활을 즐기기 위해 인간은 공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땀 흘려 공부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식의 이익을 목표로 아이들에게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며, 감히 말한다면 쓸데없는 일입니다.

앞선 세대가 가르쳐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아남게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가르쳐야 하는 것은 개인이 살아남는 기술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집단이 살아남기 위한 기술입니다.

앞으로 수백 년을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것을 '깨닫는' 능력을 익히게 하는 것이 교육의 본뜻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p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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