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국어를 맡고 있지만, 2학년 진로 수업도 매주 한 시간 지원하고 있다. 진로 과목은 도서관에서 자유 독서를 많이 하는데, 지난 주에는 학생 두 명이 국어 과제를 마무리해도 좋으냐고 물어서 허락해 주었다. A4 종이를 8등분하여 접어서 자신의 여행 경험을(다른 경험도 좋단다)을 간단한 그림과 대사로 그려넣고 마지막 칸에는 그 경험에 대한 해석을 적는 것이었다. 과제를 하는 녀석의 주제는 태국 여행이었고 여행 경험이 한눈에 잘 들어오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도 한번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괜찮은 과제였다.
"재미있는 과제구나!"
내 반응에 열심히 그림에 색깔을 칠해넣던 학생은 "재미는 없어요" 한다. 그냥 숙제니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쌤, 이게 대체 국어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 옆의 녀석도 거든다.
"쌤, 국어 시간에 활동이 너무 많은데,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보기엔 의미 있는 활동으로 보이는데, 활동이 싫으니?"
"활동만 계속하는 건 싫어요. 지난 시간에도 활동했는데 연이어 또 해요. 지금 이 과목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과목이 수행평가 하느라 정신 없거든요. 그러면 막판에 쌤들이 진도를 정신없이 나가서 나중에 더 힘들어요. "
다른 녀석이 말한다.
"활동 때문에 시간 없어서 진도 빨리 나가는 게 싫어요. 차라리 지금 교과서를 했으면 좋겠어요."
이 학생들의 담당 교사를 나도 잘 아는데, 수업 시간에 이것저것 다양한 활동들을 열정적으로 시도하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참신한 활동도 많았다. 하지만 교사의 의도와 학생의 반응은 어긋날 수도 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무리 좋은 활동이라도 학생들이 그 의의를 충분히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들도 "모든 시간이 미술 시간이 된다"고 하소연할 만큼 요즘은 평가자의 눈에 화려하고 번듯한 모양으로 제출되어야 하는 과제가 많이 부과되는 것 같다. 이 과목 저 과목 수행평가를 모두 하는 학생들로서는 활동의 의의를 체감하기보다는 단순한 '노가다'로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 '학생 중심' 수업, 학생들의 활동 위주로 꾸려지는 수업을 지향하는 게 대세지만, 학생 활동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꼭 교육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교육이 지향하는 활동은 '활동 그 자체'가 아니라 학생들의 사고가 촉진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지금 교육 현장은 눈에 보여지는 활동 그 자체에 매몰되는 감도 적지 않다. 교육 현장도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지식 위주로 수업이 이루어지던 게 대세였다면, 지금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된다. 문제는 지금은 그림/신문제작 등의 표현 방식이 워낙 보편화되어 새로움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오히려 '텍스트'와의 직접적인 맞부딪힘이랄까, 텍스트 해석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 더 필요해 보인다. 아이들이 유투브 영상으로 정보를 접하는 것이 워낙 보편적인 시대여서, 문자 그 자체를 상대할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것이 국어교육의 가장 소중한 임무로 보이는 것이다.
아무튼 2학년 학생과의 잠깐의 대화는 내게 '교육적 경험'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듀이를 다시 읽었다. 어떤 경험/활동이 교육적인가. 이에 대해 가장 명징한 답을 주는 사람은 듀이라고 생각한다. 듀이만큼 교육적 경험에 대해 사유한 학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듀이는 어떤 경험이 교육적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계속성의 원리와 상호작용의 원리이다.
학생의 주관성과 교과의 객관성이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 상호작용의 원리이다. 따라서 지식의 일방적인 주입과 그에 대한 학생의 재현은 교육적 경험이 될 수 없다. 성장은 학생의 주관이 교과로 대변되는 인류의 경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러므로 교사는 교과의 딱딱한 논리적 체계에 감춰진 인류의 경험을 생생하게 복원하여 학생들이 심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시하는 사람이다. 듀이는 이를 '교과의 심리화'라고 불렀다.
계속성의 원리는 앞의 경험이 다음 경험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하나의 배움 혹은 교육적 경험을 통해 다음에 또 배우고 싶은 흥미를 가질 때 교육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듀이에게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는 '흥미'는 배움 뒤에 사후적으로 오는 것이다. 듀이는 흥미와 충동이 어떤 일을 하도록 추동하는 의지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학생의 흥미가 그 자체로 교육적 의미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국어, 사회, 도덕, 영어 등 교과교육 전공자들은 자기 교과 지식만으로도 방대한 세계여서 교과의 논리적 체계 그 자체에 갇히기가 쉽다. 교과 지식과 학생의 정신적 성장과 발달이라는 교육의 목표가 항상 괴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중등학교에서 그렇다.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목적을 망각하면 교과 지식 안에 갇히거나 학생이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기가 쉽다. 나도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배우면서 비로소 듀이를 제대로 접하게 되었고, 듀이를 숙고하게 되는 건 요즈음이다.
듀이는 20세기 초반의 학자지만 교육적 경험으로서의 수업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그 어떤 최신 이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과목이든 교과교육은 교과와의 만남이 학생의 정신적 성장을 촉진하도록 학생들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상호작용의 원리), 그 경험 후에 배움을 계속하고 싶은 동기가 생기는 것(계속성의 원리), 이 두 가지 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움의 목적은 '성장'이다.
학교 이야기/schooling
교육적 경험(educative experience)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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