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먹는... 그 뭐지?”
“책 먹는 여우.”
“아, 맞다!”
“엄마가 집 나가는 이야기는?”
“돼지책.”
교실 곳곳에서 어릴 때 읽은 그림책 제목을 기억해내느라 술렁인다. ‘한 학기 한 권 읽기’ 시작 전, 자기가 그간 읽은 책을 기억나는 대로 모두 적어보는 시간이다. 학생들에겐 자기 독서 경험을 전반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 괜찮고, 교사에겐 아이들 개개인의 독서 성향을 엿볼 수 있어 좋다. 어떤 아이들은 만화책만 한 가득 읽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백설공주 흥부놀부 이후 읽은 게 없다. 꽤 고상한 책들을 많이 만나본 녀석도 있고.
지금 우리학교 중1은 여느 해보다 동심이 더 충만한 아이들이라 자기가 네다섯 살 때 읽은 그림책들을 기억해낼 때 특히 신이 났다. 세대가 같아서 그 시절 읽은 책은 서로 비슷해서 교실 여기저기서 “맞다, 그거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도 어린 녀석들이 더 꼬맹이였던 날을 추억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마법천자문, 그리스로마 신화, why시리즈는 공통으로 많이 읽었다.
내 어릴 적 최고의 책은 <제인 에어>. 6학년 때 친구가 보길래 빌려 읽었는데 처음 접한 묵직한 고전이다. 몇 년 전에 몇 십 년만에 다시 봤는데 1840년대, 브론테가 그려내는 당찬 여성상에 새롭게 감동했다. 가난하고 고아인데다 예쁘지도 않은 한 여인이 자기 소신대로 세상을 거침없이 헤쳐가는 이야기. 21세기를 사는 나도 180년 전 제인 에어만큼 내 앞의 생과 사랑에 정직하고 용감하지 못했구나 싶다.
중학교 때 읽은 최고의 책은 에이스88전집. 그 중에 <매는 하늘에서만 빛난다>(지금 ‘어스시의 마법사’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번역이 훨씬 못함), <호비트 대모험>, <반지 이야기>, <크라바트>, <끝없는 이야기> 등이 특히 좋았다. 그밖엔 A. J. 크로닌의 소설이 좋아서 다 찾아 읽었고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도 마음을 휘저은 책이라 몇 번이나 봤다. 헤세의 책은 주인공의 구도적 자세가 신선했고,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한 책은 까뮈의 <페스트>.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 제일 많이 읽었고, 고교 땐 3년 내내 야자하는 학교를 만나 학교만 간신히 다녔다. 체력이 약해 집에선 잠만 잤던 기억 뿐. 30대 이후론 소설이 잘 안 읽혀서 별로 못 봤다. 그래도 기억나는 몇 작품은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정말정말 좋았다. 아주 긴~ 시간여행을 선물하는 책. 주제 사라마구의 모든 작품 다 좋고 조지 오웰도 깊이 존경. 한국소설 중엔 몇 년 전에 본 성석제의 <투명인간>이 인상 깊었다. 며칠 전에 본 위화의 <제7일>은 별 생각 없이 지하철에서 첫장을 폈다가 내려야 할 역도 놓치고 우왕좌왕. 집에 와서 엉엉 울면서 보았다. 망자들의 세계를 이처럼 따스하게 그리다니. 대단한 필력. 노벨상 타셔도 될 듯.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미하엘 엔데의 <오필리아의 그림자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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