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신체일까? 마음/생각/영혼일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왔을까? 과거에 철학이 이 물음에 답해왔다면 오늘날에는 뇌과학이 이에 관한 열쇠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먼저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인간 뇌의 3층 구조를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뇌의 구조는 우리 존재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생명현상을 담당하는 원시뇌로 파충류의 뇌로 불리는 뇌간과 감정을 담당하는, 표유류의 뇌로 불리는 구피질과,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신피질로 나뉘어져 있다. 이 뇌의 3층 구조는 차례차례 발달해왔기에 인간의 진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생명 현상, 감정, 이성의 영역 중에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온 것은 무엇일까? 과거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성과 감정을 분리된 기능으로 다루고 감정을 더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서 '감정'을 인간성의 근간으로 본 철학자가 있다. 데카르트와 같은 시대, 17세기에 살았던 스피노자다. 그리고 현대의 뇌과학은 스피노자가 옳았음을 증명한다. 이 책 <스피노자의 뇌>는 바로 뇌과학을 바탕으로 스피노자의 직관을 풍부하게 파헤친다. 과학 용어가 낯설고 번역이 괜찮은 편이나 아주 매끄럽지는 않아서 400쪽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이 주는 통찰은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감정을 정서와 느낌, 두 가지로 더 섬세하게 구분한다. 정서란 외부의 사건이나 상황이 우리 신체에 일으키는 감정의 변화이며, 느낌은 외부의 사건이나 상황에서 촉발된 정서가 우리 뇌의 감각 지도와 마음의 복잡한 연상 작용을 거쳐서 개인적인 형태로 우리 내면에 자리잡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서가 먼저이고 느낌이 그 뒤를 따른다. 정서가 외부 사건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파장이라면(정서도 배경정서, 일차적 정서, 사회적 정서로 나뉜다), 느낌은 정서가 한 개인의 심리작용 속에서 증폭되거나 소멸하거나 변화하면서 생성되는 것이기에 정서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성격을 띤다(느낌을 좌우하는 것은 그래서 우리 외부가 아니라 내면의 심리적 경향성을 따른다). 그래서 같은 사건도 사람들에게 조금씩 다른 정서적 파장을 일으키고 각 개인이 받는 느낌은 더욱 달라진다.
스피노자는 이 느낌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생명 조절 현상이라고 보았다. 느낌은 우리가 외부 세계와 맺는 관계의 질을 보여준다. 느낌은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며, 온갖 신경 화학 물질들이 일으키는 반응을 우리가 일정 정도 지각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즉,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중요한 두 축은 어떤 만남이나 상황, 우리 내면의 상태가 생명체로서의 우리 존재를 더 건강하게 하는지, 생명 현상을 감퇴시키는지를 지각하게 해준다. 느낌을 좀 더 섬세하고 깊게 알아차릴수록 우리는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해로운 감정을 불러오고 어떤 만남이 우리를 더 조화로운 상태로 이끄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느낌은 우리의 생명 상태와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매우 고차원적인 정보이다.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어떤 정서를 촉발하고 그것이 우리 신체의 감각 지도를 거쳐서 내면에 어떤 느낌을 형성하는지를 알아차리면, 우리는 우리에게 해로운 상황(외부 사건일 수도 있고 내면의 정서적 습관일 수도 있다)을 의식적으로 멀리할 수 있으며, 우리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만남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바라는 바이다. 느낌을 억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성의 역할이 여기에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마음이 몸의 관념"이라는 스피노자의 통찰이다. 정서와 느낌, 그것이 바로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자 생각이다. 느낌 그 자체가 바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며, 그것을 언어로 번역한 것이 생각이다(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는 수준은 다 다르지만). 그러므로 정서와 느낌이 없으면 생각도 사유도 존재할 수 없다. 생각은 정서와 느낌에서 출발한다(들뢰즈는 이에서 영감을 받아서 느낌에서 출발한 사유와 정서적 근거 없이 단지 머리를 굴리는 생각을 구분한다). 저자는 많은 신경학적 연구를 통해 판단력 부족과 삶을 관리하는 능력의 부족이 정서적 결함이 그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인간의 심리적 복잡함과 사유의 복잡함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풍부하게 느끼는 데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책에는 느낌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에 대한 적절한 예가 등장한다. 평소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던 환자가 뇌신경에서 슬픔과 우울과 관련되는 부분이 자극되었을 때, 갑자기 죽음과 관련된 온갖 생각들을 끌어와서 그런 감정을 토로하는 장면이다. 즉 정서와 느낌은 연상 작용에 의해 그것과 관련되는 온갖 생각들을 끌어오고 그래서 그 느낌을 더욱 증폭시킨다. 삶의 공허함의 원인은 대부분 정서적 공허함이 그 원인이며, 저자는 영적 경험 또한 강렬한 조화의 경험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뇌과학자다운 정의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없다(우리 몸이 이 세계를 지각하고 생각하는 통로가 ‘느낌’이기에). 우리는 매순간 느낌 속에서 살아가며 그 느낌은 우리의 지각, 호르몬 등이 종합적으로 얽힌 생명의 활동 상태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준다. 자아에 대한 정보이다. 그러므로 느낌이 없다면 고차원적 자아는 형성되지 않는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더 개별적이고 복잡한 자아로 존재하는 것도 정서와 느낌 때문이다. 우리는 매순간 몸으로 생각하는 존재이며, 몸이 하는 그 생각의 일부를 언어로 포착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직관대로 몸의 관념이 곧 마음이다. 스피노자는 마음과 몸의 이분법을 물리쳤으며 이 둘이 속성은 다르지만 동일한 실체에서 유래하는 평행하는 두 기능이라고 보았다.
느낌을 의식화할수록, 언어의 빛으로 포착할수록, 즉 우리가 우리 몸으로 하는 생각을 관념으로 표현할수록 우리는 우리 감정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상황을 멀리하고 창조적인 만남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윤리, 스피노자의 도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 현상에서 유래한다. 우리 존재를 더 건강하게 하는 만남, 그것이 윤리의 기초가 된다. 나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타인과 사회에도 유익이 된다.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빛나는 문장은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아래 인용). 스피노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감정론은 윤리학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을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또 우리의 정신을 고찰해 볼 때, 만일 정신이 단독으로 존재하고 자기 이외의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는다면, 확실히 우리의 지성은 보다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외부에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할 만한 것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의 본성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전적으로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체가 서로 결합한다면, 단독의 개체보다 두 배의 능력을 가진 한 개체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인간만큼 유익한 것이 없다. 말하건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점에서 일치하여 모든 사람의 정신과 신체가, 말하자면, 하나의 정신과 신체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이 다함께 가능한 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며, 모든 사람이 다함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어떠한 것도 바랄 수 없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내려진다.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들, 즉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바라지 않는 어떠한 것도 자신들을 위해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정하고 성실하며,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에티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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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쾌락,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온갖 느낌들은 우리 마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p7
느낌은 단순히 정서에 덧붙은 장식물이 아니다. 내키는 대로 간직하거나 집어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글자 그대로 느낌이라는 장막을 들추어보면 생명체의 내면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줄타기와도 같은 아슬아슬한 생명의 현상에서 대부분의 느낌은 균형에 도달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표현이다. 균형을 이루기 위한 절묘한 조정과 수정 없이 너무 많은 실수가 벌어진다면 생명 조절 행위 전체가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이다. 인간 존재의 왜소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드러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느낌이다. p12
스피노자는 충동, 동기, 정서, 느낌 — 스피노자가 통틀어 감정(affect)이라고 부른 것 —을 인간성의 중심으로 보았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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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사랑이란 다름 아니라 외부의 원인에 대한 관념(idea)에 동반하는 즐거운 상태, 기쁨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느낌이라는 절차를 정서의 원인이 되는 대상의 개념을 떠올리는 절차와 명확하게 구분해냈다. 기쁨과 기쁨을 일으키는 대상은 별개라는 것이다. 물론 기쁨과 슬픔은 결국에는 그와 같은 느낌을 일으키는 대상과 함께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에, 우리 몸 안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작업이었다. p18
스피노자는 또한 감정(affect)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해로운 감정(비합리적인 정념)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이보다 더 강력한 긍정적인 감정, 즉 이성이 촉발한 감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감정은 "오직 그보다 더 강력한 상반된 감정으로만 억제되거나 중화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스피노자는 부정적 정서와 싸울 때 그보다 더욱 강한 정서, 이성과 지적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긍정적인 정서를 가지고 맞서라고 우리에게 권고한 것이다. 그의 생각의 핵심은 순수한 이성 자체가 아니라 이성으로 유도된 정서가 동반될 때 열정을 억누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19
내가 논의하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은, 마음과 몸이 동일한 실체의 평행하는 속성들(표현들)이라는 그의 개념이다. 최소한 마음과 몸을 서로 다른 실체의 바탕 위에 놓지 않음으로써 스피노자는 심신 문제에 대하여 그의 시대에 우세했던 견해에 반대되는 시각을 내놓았다. (...)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마음이 몸의 관념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p19
나는 심적 절차가 신체에 대한 뇌 속의 지도, 즉 정서와 느낌을 만들어내는 사건에 대한 반응을 표현하는 심경 패턴의 집합체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확신한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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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특정 대상과 특정 정서 간의 관계를 자각하고 어떤 대상과 상황을 우리의 환경에 허락하느냐, 그리고 어떤 대상과 환경에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쏟아 붓느냐를 결정함으로써, 고의로 자신의 정서를 조절하고자 노력할 수 있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상업 방송을 보지 않기로 결정하고 지성인의 집에서 상업 방송을 영원히 추방하자고 촉구할 수도 있다. 특정 정서를 일으키는 특정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명 절차에 대하여 어느 정도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을 좀 더 높거나 낮은 조화 상태로 이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스피노자가 바랐던 것이다.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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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와 느낌을 이해하기 쉽도록 묘사하기 위해서 나는 정서와 느낌이 하나의 자극에서 시작해서 그 자극과 관련된 느낌의 기질을 조성하는 것으로 긑나는 일련의 사슬에 들어맞게끔 단순화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절차는 측면으로 뻗어나가 수많은 평행한 사건의 사슬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증대된다. 그 이유는 정서적으로 유효한 최초의 자극이 많은 경우에서 또 다른 관련된 자극(역시 정서적으로 유효한 자극)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추가된 유효 자극은 동일한 정서의 촉발을 유지시키거나, 정서의 변화를 촉발하거나, 심지어 상충하는 정서를 촉발하기도 한다. 최초의 자극에 대한 정서적 상태의 지속과 그 강도는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인지 절차에 달려 있다. 마음의 내용에 따라서 정서적 반응이 추가로 촉발될 수도 있고 제거될 수도 있다. 그 결과, 정서가 유지되거나 심지어 증대될 수도 있고, 아니면 점차로 잦아들어 사라질 수도 있다. p81
슬픔이라는 정서가 전개되면, 슬픔에 대한 느낌이 재빨리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즉시 뇌는 보통 슬픔이라는 정서와 슬픔의 느낌을 일으키는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연상 학습을 통해 정서와 생각이 풍부한 쌍방향 연결망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특정 생각은 특정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반대로 특정 정서는 특정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절차의 인지적, 정서적 수준은 계속해서 이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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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은 신체의 특정 상태에 대한 지각인 동시에 사고의 특정 방식, 그리고 특정 주제를 가진 생각에 대한 지각이다. 뇌 지도에 그려진 세부적인 변화들이 축적되어 특정 상태에 이르면 느낌이 나타난다. 또 다른 시각에서 이것을 바라본 예로서 수잔 랑어는 느낌의 출현 순간을 다음과 같이 포착해냈다. 신경게 일부의 활동이 '결정적인 수준'에 도달할 때 그 절차가 느껴진다. 그리고 느낌은 진행되고 있는 항상성 절차의 결과이자 연속적인 사슬에서 항상성 절차의 다음 단계에 놓여 있다. p105
느낌은 일종의 지각이며, 어떤 면에서 느낌은 다른 종류의 지각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서 시각적 지각은 외부의 대상에 대응하는데, 그 대상의 물리적 속성은 우리의 망막에 영향을 주고 일시적으로 시각기관의 감각 지도 패턴을 변경시킨다. 느낌 역시 그 절차의 초기에 대응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대상의 물리적 속성은 일련의 연쇄적 신호를 촉발시키며, 이 신호들은 뇌에 있는 대상의 지도를 따라 전달된다. 시각적 지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현상은 대상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고 내면적인 뇌의 구성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차이점은 느낌의 기원이 되는 사건 또는 사물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p110
느낌은 그 기원이 되는 대상, 즉 신체에 연결될 뿐만 아니라 정서-느낌 주기를 개시한 정서적으로 유효한 대상에도 연결된다. (...) 따라서 우리가 정서나 느낌의 대상이라고 말할 때 어떤 대상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멋진 바다 경치는 정서적으로 유효한 대상이다. 그리고 그 경치를 바라본 결과로 비롯된 신체 상태가 느낌의 기원에 존재하는 실제 대상이며 그것이 느낌 상태에서 지각된다. p110-111
다시 말해서 느낌은, 특히 기쁨과 슬픔의 느낌은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이나 번쩍 하고 지나가는 섬광이 아니다. 그와 같은 느낌이 시작되고 얼마 후에 역동적인 신체 반응이 나타난다. 이것은 거의 확실하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그 다음 또다시 역동적인 지각 활동이 뒤를 따른다. 우리는 그 일련의 변화를 지각하고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감지한다. p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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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설은 무엇에 대한 느낌이든지 간에 느낌은 뇌의 체성 감각 영역의 활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체성 감각 영역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뇌의 핵심적 시각 영역을 제거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경험하는 느낌은 뇌의 체성 감각 영역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p133
뇌는 생명체의 상태 전반에 대하여 신경 말단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국소적으로 정보를 얻고 혈류를 통해서 포괄적이고 화학적인 정보를 얻는다. 뇌는 살아있는 생명체 전체에 걸쳐서 생명 상태의 표본 추출을 실시하고, 이 놀랄 만큼 광범위한 표본 추출 자료를 가지고 생명 상태에 대한 통합된 지도를 추출해낸다. 우리가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때, 그러한 기분은 체내 환경의 화학적 상태를 그린 지도에 근거한 복합적인 표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뇌간이나 시상하부에서 진행되는 신경의 신호활동은 결코 자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쩌면 부정확한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신경 신호활동의 일부는 특정 형태로 항상 자각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그것이 이른바 배경 느낌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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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긍정적인 느낌과 부정적인 느낌이 생명 조절 상태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생명 조절 상태가 최적의 상태에서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먼 지에 따라 신호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느낌의 강도 역시 부정적인 상태라면 그 상태를 수정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지에 관련될 것이며, 긍정적인 상태라면 항상성의 기준점을 지나서 최적의 상태 쪽으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와 관련될 것이다. p157
그렇다면 느낌은 생물의 내부를 탐색하는 심적 감지기이자 진행중인 생명 활동을 증거하는 목격자라고 할 수 있다. 느낌은 또한 우리의 파수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느낌은 덧없고 제한된 우리의 의식적 자아로 하여금 짧은 기간 동안의 우리 생명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느낌은 균형과 조화, 또는 불균형과 부조화의 심적 현시이다. 느낌은 바깥세상의 조화나 부조화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우리 몸 깊은 곳의 조화나 부조화를 나타낸다. 기쁨과 슬픔 및 다른 감정들은 우리를 최적의 상태로 생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절차에서 갖게 되는, 우리 신체에 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약물이나 우울증 때문에 그 충실성이 훼손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기쁨과 슬픔은 생명 절차의 상태를 드러내준다.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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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환자들에게서 보이는 추론 능력의 결함, 자기 삶을 관리하는 능력의 결여가 정서와 관련된 신호의 손상 때문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는 이 환자들이 주어진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러 가지 가능한 선택 가운데에서 좀 더 이로운 선택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정서와 관련된 기억을 활성화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환자들은 그들이 삶에서 축적해 온 정서와 관련된 경험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서가 결여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의사 결정은 분명히 터무니없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p170
인간에게서 정서와 느낌이 없어진다면 인간의 경험은 매우 빈약해질 것이다. 만일 사회적 정서와 느낌이 적절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회적 상황과 기쁨 및 슬픔 간의 관계가 무너진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는 정서/느낌의 표지에 따라 자신의 자전적 기억 속에 저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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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그 주인에게 자각될 경우, 삶을 관장하는 느낌의 절차는 더욱 개선되고 증폭된다. 느낌의 이면에 자리 잡은 장치가 특정 순간에 생명체의 각기 다른 신체 요소의 상태에 대해 명백하고 강조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생물학적 수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느낌은 관련된 신경 지도에 '주의'라는 도장을 쾅 찍어주는 셈이다. p209
느낌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정서 및 정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심적 수준에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완전한 의식의 빛 아래 놓인 심적 수준의 생물학적 절차만이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충분히 통합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이 수준에서만 정서가 느낌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에 대한 관심을 창조해낼 수 있다. 표준화되지 않은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오직 심적 절차가 제공할 수 있는 유연성과 고차원적 정보 수집, 그리고 느낌이 제공할 수 있는 심적 수준의 관심이 필요하다.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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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적 경험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될 수 있는 한 가장 완벽하게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강렬한 조화의 경험과 같은 것으로 보고자 한다. 이 경험과 더불어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이 펼쳐지게 된다. 따라서 영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잔잔하고 고요한 형태로 나타나는, 일종의 기쁨이 지배하는 특정 종류의 지속적인 느낌을 갖는 것이다. (...) 영적 경험이라는 것은 균형이 잘 잡히고, 잘 조율되고, 좋은 의도를 가진 삶의 이면에서 조직화되고 있는 계획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p3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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