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 동산의 아담은 행복했을까? 스피노자라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의식이 제 1원인이라고 착각하고, 그러한 자신의 의식으로 자유 의지를 행사한다고 믿으며(아이는 자유 의지에 따라 우유를 욕구하고 겁 많은 사람은 도망가기를 욕구한다고 생각하고), 그 자유 의지의 결과에 따라 영예 혹은 처벌을 받는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의식의 환상을 거부했다.
그에게 의식의 원인은 욕망이다. 욕망은 우리의 신체/정신이 자신 속에 계속 머무르려는 노력(즉 코나투스)이며, 이는 우리의 신체/정신이 다른 대상들과 만나서 생기는 감응(변용)에 의해 결정된다. 즉 의식은 신체와 사유의 결과이다. 신체와 사유 속에서 변용되는 욕망은 일종의 운동이며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념으로 이행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 기쁨이고 그 반대가 슬픔이다. 스피노자는 이 기쁨과 슬픔으로 삶을 철학한다.
그에게 도덕적 당위나 초월적 가치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삶 그 자체의 드러냄'을 열망했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기쁨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에게 선악은 없지만 좋음과 나쁨은 존재한다. 이 좋음과 나쁨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혈액 속의 독처럼 객관적인 것, 존재의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 그에게 좋음이란 자신의 본성과 맞는 좋은 관계들을 구성하여 자신의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우연 속을 살아가고 그 결과들을 수동적으로 겪지만, 그 수동성 속에 묻혀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 만남 속에서 삶에 대한 원한을 드러내는 것을 스피노자는 예속 혹은 무능력이라고 보았다.
스피노자만큼 철저히 삶을 긍정한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삶이 아니라 삶과 비슷한 그 무엇을 영위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삶을 거역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선악)에 반대하여 삶의 내재적 능력(좋음과 나쁨의 인식)이 살아나기를 원했다. 그는 희망과 안정 속에서도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슬픔의 씨앗을 발견하고 거부했다. 그는 슬픈 정념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를 거부하고 폭군을 숭상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직 기쁨과 전망만을 믿었다.
자연 속에서의 우리의 처지로 인해 우리는 나쁜 만남과 슬픔들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부적합한 관념들을 버리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나아가는 관념들을 구성하는 것이 윤리이다. 자신의 행위 능력 즉 '존재의 힘'을 증가시키는 법을 아는 사람, 자신의 본질과 부합하는 부분들을 자기 내면에 결합할 줄 아는 사람은 '영원성'을 획득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지복이라 불렀다. 이는 본질에 의한 본질의 변용이다. 스피노자에게는 악이나 나쁜 것은 그 어느 것도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누구의 본질도 증가시켜주지 못한다.
스피노자가 결국 긍정하는 것은 삶의 내재성이다. 투쟁과 갈등, 삶의 모든 소용돌이를 긍정하고 이 숱한 관계들의 교차 속에서, 수동적인 변이를 겪지 말고, 능동적 기쁨을 낳는 관념들을 생성하는 훌륭한/건강한 삶을 추구했다. 기쁨의 힘과 자유에 대한 절대적 긍정. 삶을 부정하는 모든 가치의 거부.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과 삶의 능력에 대한 확신. 두 번 읽었으나 어려워서 스킵한 내용이 많은 책이지만 이것은 확실해 보인다. 앞으로 그 어떤 철학자도 스피노자만큼 용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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