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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카를 융이 80세가 넘었을 때 자기 일생을 한 마디로 규정한 말이다. 대학자다운 발언이면서, 고귀한 목적에 바쳐진 그의 생애의 깊이를 한 마디로 설명해주는 말이다. 멋있다 아니 할 수 없다.
여행 중에 융 심리학을 전공한 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꿈을 꾸준히 기록할 것을 권하면서 그렇게 하면 자신의 에너지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무의식 속에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고, 그 겹겹의 층 아래에 있는 '자기'의 소리가 바로 신의 소리라고 했다.
심리학엔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인간의 정신이 신비롭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껏 나는 심리학보다는 사회학에 좀더 관심을 가진 편이고 그러면서도 사회과학도는 결코 못 되고, 문학의 따끈따끈한 감성에 더 이끌리는 편이다. 하지만 말만 현란한 것은 싫고, 철학적인 소재를 좋아하는... 내 취향은 사회과학/역사와 문학의 중간 정도에 서 있는 셈인데,,, 결론적으로 어느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
아무튼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집에 돌아와 이 책을 읽었다. 사놓긴 진작에 사놓았는데, 읽을 새가 없었던 책이다. 카를 융 최후의 자서전. 평생 동안 인간 무의식의 거대한 바다를 항해했고 뛰어난 통찰을 이끌어내었던 대학자가 말년에 자기 생애를 회고하며 밝힌 이야기다.
융은 영원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는 과학이 아니라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은 외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사건, 그가 지녔던 꿈과 환상들을 통해 표현된다. 매우 독특한, 영성적인 자서전이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다. 육백 페이지가 넘는 그의 고백들을 따라가다 보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에서 잊혀지고 있는 인간 정신의 신화적 측면, 인간 영혼의 광채랄까 그런 것이 전해져 온다. 사후의 삶이 있는 것 같고, 인생의 영원성이 잔잔히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내게 특별한 책이었다.
우리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pp491)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둘은 모두 옳지만 인도적 의미에서는 부처가 보다 완전한 인간이다. 부처는 역사적 인격체이므로 사람들에게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므로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사실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내부로부터 자신에게 부과된 일인 것처럼 자신이 희생당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의 희생은 하나의 숙명으로 그에게 닥쳤다. 부처는 통찰에 따라 행동했다. 부처는 자신의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죽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짧은 것으로 여겨진다. (pp495-496)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거칠고 잔혹하며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무의미와 의미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믿느냐 하는 것은 기질의 문제다. 만약 무의미성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면, 더 높은 정신발달 과정에서는 인생의 의미충족성이 점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가 그렇듯이 아마도 양쪽이 다 진실일 것이다.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여 전투에서 이겼으면 하고 마음 졸이며 희망하고 있다. (pp630)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둘은 모두 옳지만 인도적 의미에서는 부처가 보다 완전한 인간이다. 부처는 역사적 인격체이므로 사람들에게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므로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사실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내부로부터 자신에게 부과된 일인 것처럼 자신이 희생당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의 희생은 하나의 숙명으로 그에게 닥쳤다. 부처는 통찰에 따라 행동했다. 부처는 자신의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죽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짧은 것으로 여겨진다. (pp495-496)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거칠고 잔혹하며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무의미와 의미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믿느냐 하는 것은 기질의 문제다. 만약 무의미성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면, 더 높은 정신발달 과정에서는 인생의 의미충족성이 점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가 그렇듯이 아마도 양쪽이 다 진실일 것이다.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여 전투에서 이겼으면 하고 마음 졸이며 희망하고 있다. (pp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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