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유명한 첫문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더 유명한 마지막 문장은 기억나지만, 그 사이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대학 시절에나 얼핏 읽어본 이 책이 갑자기 읽고 싶어졌어요. 최근 '노동'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십대 때만 해도 '노동'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학교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는 게 꽤 힘들었지만, 나 자신 임금을 받는 노동자였지만, 그럼에도 제가 '노동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일한 지 몇 년 안 되던 때라 그때그때 눈앞의 일에 적응하느라 바빴을 뿐 '노동'이라는 것이 내 삶의 시간을 얼마만큼 잡아먹고 그 시간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지는 생각지 못했던 시절이지요. 결혼도 매우 늦게 했고, 결혼 전까지는 가사노동도 거의 해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일상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영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어리석게도!
전문직이건 단순직이건 일의 성격이 다르고 보수 또한 많이 다르다 해도 내 몸과 정신을 쓰는 '노동'을 통해 살아간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물론 소득이 많은 직종의 경우 임금 수입을 자본으로 축적하여 일정한 자본을 획득해서 자본가로 진입하기가 유리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긴 하지만 ‘나’를 써서 돈을 번다는 점에서 노동자입니다.
20년을 일하고 나니,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을 많이 느낍니다. 물론 저보다 훨씬 힘들고 대가도 적은 노동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제 입장에서는 제가 하는 노동이 만만치 않습니다. 방학 때 탈출구로 여행을 다녀올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나 그 잠깐의 여유를 제외한다면 지난 이십년간 정말 일만 하며 살았구나 싶습니다. 자본 소득이 아니라 노동 소득으로만 살아온, 성실한 노동자의 삶이었습니다. (자본 소득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적절한 세금을 부과하면 됩니다.)
아마 요즘처럼 노동의 가치가 하락한 때는 없는 것 같아요. 노동 소득이 자본 소득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른 것이죠. 노동 소득만으로는 삶의 적절한 안정적 기반을 구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많은 젊은이의 경우, 자신의 '노동'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제 경우 20년차를 넘어가니 호봉이 올라 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소득을 얻고 있으나, 이 노동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좀 자신이 없습니다. 노동 강도가 너무 세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편으로는 이 노동에 질리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제가 즐겁게 하는 노동이 10~20퍼센트라면, 80퍼센트는 각종 잡다한 일, 산만하지만 매우 기계적인 일을 처리하는데 말 그대로 제 몸과 정신을 갈아넣고 있습니다. 이 노동을 지속하자니 자신을 너무 소모시키는 것 같고, 다른 노동으로의 전환은 현재로선 가능한 것 같지 않고...
19세기(1848년)에 쓴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고 살짝 위로를 받았는데요(좀 이상한 힐링이긴 하네요). 그건 이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그들의 힘찬 선언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제가 하는 노동에는 몸과 정신을 닳게 하는,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측면이 너무 많습니다.
맑스 시대와 달리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비율은 1:9 혹은 2:8이겠으나 노동자의 종류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죠. 월 이백 받는 노동자부터 월 수천만 원 받는 노동자까지. 월급이 많건 적건 자기 노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다는 점에서 서로가 같은 노동자라는, 그런 연대 의식을 갖기가 어렵죠.
그렇지만 맑스/엥겔스의 선언은 우리에게 중요한 감각을 녹슬지 않게 합니다. 우리가 하는 노동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개선하기 위해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메시지죠.
"그들은 세계를 가질 것이다(그들은 세계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십대 중반 젊은이의 이 담대한 선언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비참함을 못 본 척 하지 않고, 타인과 조화롭게 협력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는 것.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필요합니다. 그 세계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동'으로 그 세계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노동'하는 가운데 그 세계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맑스는 다른 글에서 직업(노동) 선택의 기준이 자신의 완성과 이웃(인류)의 행복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어요. 스케일이 대단히 크죠. 젊은이의 패기가 쩌렁쩌렁 느껴집니다. ‘공산당 선언’도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젊은이의 패기 있는 선언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돋을새김'에서 펴낸 건데, 쉽고 매끄러운 문장이라 이해가 잘 되지만, 문장의 시적 울림이 좀 부족한 감이 있네요. 다른 번역본으로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이 책의 초판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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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쥐고 있는 상대로부터 공산주의라 비난받지 않았던 반정부당이 있었던가? 그 반정부당 역시 자신들에게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당은 물론, 조금 더 진보적인 반정부당을 향해 공산주의라는 비난 섞인 낙인을 되돌려주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p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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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계급은 사람들이 경외심을 품고 우러러보던, 존중받아온 모든 직업들의 후광을 없애버렸다. 그들은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을 자신들에게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전락시켰다.
부르주아 계급은 가족을 감싸고 있던 감상적 장막을 갈가리 찢어 없애, 가족 관계를 단순한 금전 관계로 격하시켜버렸다. p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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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계급은 세계 시장의 개척을 통해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부르주아 계급은 산업이 딛고 서 있던 민족적 기반을 그 발밑에서 빼내버렸다.
오래전부터 정립돼 있던 민족적 산업들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일상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중이다. 이 민족적 산업들은 더 이상 토착 원료가 아닌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가져온 원료를 가공하며, 국내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그 생산물이 소비돼는 새로운 산업에 의해 쫒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산업의 도입은 모든 문명국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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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계급은 농촌이 도시의 지배를 받도록 만들었다. 거대한 도시를 만들어내 농촌인구에 비해 도시인구를 엄청나게 늘렸으며, 인구의 상당 부분을 농촌 생활의 우매함으로부터 구해냈다. 또한 농촌을 도시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듯이, 미개국과 반미개국들을 문명국에, 농업 국가를 부르주아 국가에, 동양을 서양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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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권력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활용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려 하는 권력을 박탈하는 것일 뿐이다.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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