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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사회, 과학

청와대 정부 | 박상훈 _ 최소 정부와 최대 정부 사이

by 릴라~ 2019. 9. 22.


저자의 모든 인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문재인 대통령 지지자의 경우 단순히 '묻지마 지지'의 경향이라기보다는 노대통령 서거의 경험, 가짜 뉴스 및 기울어진 언론 환경 등에서 나온 반응이 많다고 본다), 한국의 정치 현실을 민주주의의 본질의 측면에서 해석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저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통령제의 한계를 비롯해서 여러 모로 생각해볼 지점이 많았다. 강추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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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 정치화' 주장과 '정치의 생활화' 주장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큰 차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런 차이가 아니다. 일상 속에서 변혁적 감수성을 지키고 키우는 '생활의 정치화'와, 좋아하는 정치인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정치의 생활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그들이 일상의 새인적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고, 바로 그것이 필자가 정치나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방식과 크게 다른 지점이다.


필자는 일상의 사적 삶이 덜 정치화되었으면 하는 관점을 갖고 있다. 혹은 잘 보호된 사적 권리와 병행 발전할 수 있는 민주주의론을 지향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확고한 분리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지만, 두 영역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어떤 사회도 개인 삶도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일상의 삶은 사랑과 우정, 연대와 공감, 죽음과 비극, 사소한 기쁨과 상실의 슬픔에 대한 자각으로 채워지고, 정치적 관심은 공적인 삶에서 구현되기를 바란다. 사적인 것도 개인적인 것도 지독히 정치적일 때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지만, 그 사안이 중요한 것일수록 개인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다퉈지기보다는 가능한 한 공적인 의제로 다뤄지길 바란다. 그래야 '책임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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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다양한 의사가 더 많이 표출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시작일 뿐, 그것으로 민주주의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불평등한 공간이다. 오래전 이탈리아의 좌파 이론가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강조했듯이, 시민들의 사회는 이른바 '헤게모니', 즉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힘을 발휘하는 곳이다. 때로 사회 속에서 집회나 시위를 크게 일으킬 수 있다 해도 그 순간이 지나면 애초의 불평등한 힘은 그대로 위력을 발휘할 때가 많다. 정치는 다르다. 정치는 평등한 시민권의 원리가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사회 속 여러 집단 이익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쟁점들은 정치의 공간에서 공적 의제로 다뤄져야 한다. 그래야 변화도 있다. 화내고 소리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닌, 불가역적인 제도 변화를 통해 사회의 불평등한 조건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곳은 민주정치의 영역이다. 사회적 요구를 정치적 공간으로 상승시키는 동시에 정부의 범위 안팎에서 공공 정책을 주도하는 정치적 부대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에서 개인 시민의 의사를 다 모으면 공익이 된다는 가정은 순진하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정치의 독자적인 역할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가 기능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는 강자의 지배가 관철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를 제어하기 위해 민주주의 체제는 정치를 인위적으로 1인 1표의 원리 위에 세우고자 했다. 즉 시민 누구나 존엄의 크기, 의견의 가치는 동등하다는 전제 위에서 정치를 제도화하려 한 것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 문화적으로 동등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공적 결정을 이끄는 정치의 영역만큼은 평등한 시민권을 갖게 한다는 것에서 민주주의는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의 원리' 위에서 운영되는 체제다. 정치 내부로 시민의 의사가 조직되고 투입되게 하는 것, 그것을 정부라는 거대한 체계 내부에서 제도화함으로써 정부가 책임의 제약을 부여받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 그 방법을 여러 시민 집단들이 익히고 활용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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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만큼 입법부와 정당이 민주주의에서 중요하다는 뜻이다. 중요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언론이나 재벌, 지식인 등의 사회 강자 집단들은 늘 정당과 의회를 야유하고 비난한다. 의회와 정당의 힘이 커지는 것도 결코 바라지 않는다. 의원 규모도 줄이고 선거도 없애고 정당 공천도 못하게 하기를 바라는 것도 이들이다. 이들은 청와대 권력이나 행정 권력을 통해 이권을 주고받지, 정당이나 의회를 통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재벌이 대표적이다. 군주정 때처럼 대통령과의 '독대'를 좋아하고,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는 일을 가장 싫어하는 그들은 확고한 반정당, 반의회주의자들이다.


지식인들이나 시민운동 리더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당에 참여해 책임 있게 발언하고 행위하지 않으며, 정당의 역할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장이나 그 주변 행정 관료의 영역에 좋은 자리가 나면 기꺼이 그 일을 맡는다. 그들은 반정치적인 동시에, '전도된 국가주의'를 갖고 있다. 그들은 늘 정당이 아닌 국가를 향한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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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단임제가 없었다면, 청와대를 중심으로 재벌과 관료제의 힘이 쉽게 결합되었을 것이다.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 동맹의 형성도 가능했을 상황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례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났듯이, 무책임하고 불완전한 한 인격체를 최고 통치자로 뽑는 대통령제, 그런 대통령이 연임하는 한국 정치란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다. 한국에서 대통령 단임제는 부정적 측면 못지 않게 긍정적 측면도 컸음을 무시할 수 없다.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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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국가가 아니고 정부이고, 왜 국민이 아니라 시민인가?"라는 질문인 것 같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 (...) '민주 국가'보다는 '민주 정부'라는 표현이 잘 호흥한다. 마찬가지로 '책임 국가'보다 '책임 정부'가, '대의 국가'보다 '대의 정부'가, '문재인 국가'보다 '문재인-민주당 정부'라는 표현이 자연스럽다. 그렇듯 민주주의는 정부와 시민이라는 개념에 상응하는 정치체계다.


자주 국가, 독립국가, 주권국가라고 쓰듯이 국가 역시 꼭 있어야 할 정치 용어이지만, 민주주의와 관련된 진술에서는 절제할 필요가 있다. 국민교육, 국민 단체, 국민권보다 시민교육, 시민단체, 시민권이 민주주의에 상응하는 용어다. (...)


정부를 뜻하는 government는 '시민이 필요해서 만든 시민의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애초 그 말은 공동체를 이끄는 것 혹은 시민의 사회를 이끄는 것을 의미했다. government는 통치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그것 역시 공동체와 시민을 이끄는 정치 리더십 혹은 그런 리더십의 집약적 행위를 가리킨다. 당시의 철학자들은 통치 체제가 좋아야 시민 개개인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뜻에서 옛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좋은 폴리스가 좋은 데모스를 만든다'라고 했다. 어떻게 보든 정부 내지 통치라는 개념은 민주주의의 기원과 맥을 갖이 한다.


국가라는 개념의 역사는 이와 다르다. 국가를 뜻하는 state는 라틴어 status에서 유래한 말로 애초에는 '지위'나 '상태'를 뜻하는 비정치적 용어였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들어와 '배타적인 영향력의 범위를 가리키는 통치의 단위'라는 의미가 덧붙여지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었는데, 그 후 국가는 '영토, 국민, 주권'의 세 요소를 가진 국제법적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내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조차도 '국가 앞에서' 애국과 충성의 맹세를 해야 하는 윤리적 실체로 격상되었다. 정부가 정치에 참여할 시민의 자유에 관계된 개념이었다면, 국가는 그 출발과 발전 과정에서 영토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국민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자기 보호의 집단적 보루'로 여겨졌다. p12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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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민을 주권자로 보고 그들의 요구대로 정부를 운영하겠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주권을, 시민 개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배타적 권리로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개인 권리를 가리키는 것은 기본권일 뿐, 주권은 개개인에게 나눠질 수 없다. 주권이란 침해 불가능한 자율적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통치를 수용하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해 시민 스스로 피통치자가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절차적 정당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정부를 운영할 통치권은 촛불집회가 아니라 대통령 선거에서 위임된 것이고, 그 정당성을 보장해 준 것은 여야를 달리 지지하는 시민 모두가 참여한 합법적 선거라는 절차에 있었다.


주권은 시민 개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들의 전체 의사다. 집회에 참여한 개인은 기본권을 가진 존재이며, 주권은 집회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전체 시민의 총의를 모으는 정치 과정을 통해 발생한다. 주권은 합법적으로 위임된 통치권을 가리키는 바, 민주주의에서라면 그것은 법을 만들고 집행할 권한을 시민으로부터 일정 임기 동안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선출직 대표들에게 주어진다. 대통령, 여야 정당, 의회가 바로 그 중심에 있다. 이들 사이에서 주권의 내용이 합당하게 따져지고 조정되어 공공정책으로 실천되는 그 긴 과정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p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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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성을 사납고 조급하게 만들고, 열렬 지지자들로 하여금 '적폐 청산의 전사'를 자처하게 해서 좋아질 일은 없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형태의 군사주의를 자극할 뿐이다. '권력자를 향한 국민적 지지의 동원'이라는 청와대 정부의 역할은 이미 사회를 분열시키기 시작했고, 그 길은 더 심화되고 있는바, 더 늦기 전에 '청와대를 위한 청와대의 통치'라는 폐쇄 회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이 길로 가다가는 내각과 집권당, 의회정치 대신 청와대를 키우고 그 주변에 대통령위원회를 늘려 일하려는 유혹에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청와대 정부' 다음은 '위원회 정부'가 올 가능성이 높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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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이나 대의냐' 하는 기준은 허구적일 때가 많다. 앞서 말한 대로, 직접 민주주의가 시민 참여의 직접성을 더 확대하는 것도 아니고, 평등한 참여보다 불평등한 참여, 배타적이고 폐쇄적 참여를 강화하는 문제도 있다. 참여의 규모나 직접성은 물론 시민권의 크기, 나아가 참여의 개방성과 평등성의 기준에서 굳이 따진다면 대의 민주주의를 역사상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된다. 다시 강조하건대,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는 같은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는 개념도 아니고, 자유롭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엄밀히 말해 직접 민주주의롸 대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고대 직접 민주주의는 정변을 통해 군주정과 귀족정을 대체한 '민중 계급의 일원적 지베체제'라 할 수 있다. 반면 현대 대의 민주주의는 공직에 대한 기존의 '세습의 원칙' 위에서 '선출의 원칙'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긴 변형 과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정치체제 이론은 그래서 '정체 순환론' 즉 1인 지배와 소수 지배, 다수 지배가 혁명 내지 정변을 거쳐 순환, 대체되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반면 근대의 정치체제 이론은 '봉건적 대의제'에서 '자유주의적 대의제', 그 뒤 '대의적 민주주의'로 불릴 만한 변화를 지속해왔다. 영국을 기준으로 하면 13세기 대헌장에서 17세기 청교도 혁명 이전까지를 봉건적 대의제라 볼 수 있고, 그 뒤에는 자유주의적 대의제, 그리고 18세기 후반 참정권이 대폭 확되된 다음부터는 민주적 대의제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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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순수하고 공익적인 인간으로 가정하고 그 위에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은 너무도 위험하다. 그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 더 관심을 갖는 시민, 기회가 주어지면 권력과 영향력을 추구할 수도 있는 평균적 시민을 상정하고도 견딜 수 있는 민주주의가 훨씬 더 건강할 수 있다. 설령 사심 없이 공익에 헌신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무지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지식과 정보를 최대로 취득한다 해도 무엇이 최선의 결정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는 '날개 없는 인간'이다. 날 수 있다는 가정으로 민주주의를 절벽 쪽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순수하지 않더라도, 무지하고 무능하더라도 평등한 시민권이 주어지고 그 위에서 작동할 수 있는 민주주의, 그것이 우리가 하고자 노력해온 민주주의다. p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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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최고의 시민 결사체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공익의 내용을 경쟁적으로 정의하며, 그를 바탕으로 시민의 참여와 지지를 경쟁적으로 조직하고, 궁극적으로 정부가 되어 공공정책을 주도한다. 그런 정당이 정부가 되고 교체될 수 있을 때 책임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래야 정부가 시민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 권력 기관으로 퇴락하지 않을 수 있으며, 최고 통치자의 자의적 국민 동원 내지 국가주의적 정치의 유혹을 제어할 수 있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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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정당들 사이'에 있어야지 '하나의 정당 속'에 가둬질 수 없다. 한 정당 안에서 다양한 정파나 계파들이 경쟁하면 일당제 안에서도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불가능하다. 당내 민주주의로 정치체제의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든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당, 하나의 정파만 있는 곳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정부 행위라는 것이 너무나 강력한 권력 효과를 갖기 때문에, 일당제는 전체주의화를 피할 수 없다. 그런 일당제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동반한다. p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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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필요해서 만든 정부가 시민에게 책임성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책임 정부는 하나의 짝을 이룬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근대 정부 이론이 발전하게 된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 전까지 정부에 대한 관념은 크게 둘로 나뉘어 경합하고 있었다. 하나는 '제한 정부'론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국가'론이다.


제한 정부란 자유주의 이론의 핵심이다. 즉, 정부의 개입은 '개인의 불가침한 권리' 앞에서 멈추는 것, 달리 말하면 정부의 역할은 그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사회 국가란 제한 정부와는 대조되는 정부관/국가관이다. 그것은 19세기 후반의 독일 비스바르크 시기, 즉 국가주의적 관료정치 체제하에서 만들어졌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의 역할은 개인보다는 사회의 공동체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사적 삶에 대한 강력한 정부의 개입이 정당화된다.


두 정부관은 목적과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전자의 자유주의 정부관은 개개인의 권리 보호에 목적을 둔 '최소 정부'에 가깝다. 후자의 국가주의적 정부관은 사회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 '최대 정부'를 쉽게 허용한다. 따라서 '제한 정부 / 최소 정부'가 극단적으로 심화되면 '야경국가'가 될 수 있고, '사회 국가 / 최대 정부'가 극단화되면 '경찰국가'가 될 수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정부관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두 정부관 모두 민주주의 이전의 정부관이라는 점, 즉 민주주의 정부관은 아니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가 가져야 할 책임성을 정부 내부에서가 아닌 정부 밖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p3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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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정부 밖의 개인과 사회를 보호해야 하는 정부 책임성'의 확대와 수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정부 내부로부터 책임성을 부과하는 원리와 제도가 발전해온 긴 과정이다. 나는 이를 앞서 살펴본 '입헌적 책임성' 및 '사회적 책임성'과 구분해 '정치적 책임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엄밀히 말해 현대 민주주의는 바로 이 정치적 책임성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점에서는 '민주적 책임성'이라 해도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권분립'을 금과옥조처럼 혹은 필요에 따라 편의적으로 말할 뿐, 그 이상의 정치적 책임성의 원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삼권의 분립은 민주주의보다는 자유주의 정부론에서 발원했고 그런 점에서 정치적 책임성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일 뿐, 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분립이 아니라 그 다음인데, 이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다.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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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긴 논의를 통해 나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의 요점에 효과적으로 도달했다고 본다. 그것은 제한 정부와 사회 국가 사이에 책임 정부라는 교차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제한 정부가 자유의 가치를 진작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고, 사회 국가가 공동체적 정의를 세우는 데 기여했지만, 그것으로는 민주 정부가 될 수 없었다. 민주주의는 책임 정부에 그 핵심이 있고, 시민 주권은 책임 정부를 통해 발전해왔다. 평등한 자유를 더 잘 향유하고 싶은가? 사회정의를 세우고 진작하고 싶은가? 이를 위해 자유주의적 제한 정부를 강화하고 사회주의나 온정주의에 기초를 둔 사회 국가를 불러들여야 할까? 민주주의자라면 달리 대답해야 한다고 본다. 핵심은 책임 정부다. 책임 정부의 발전을 통해서만이 제한 정부와 사회 국가는 민주주의 정부론에 통합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의 양립, 개별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의 병행 발전 역시 책임 정부 속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시민적 사업이 될 수 있다. 이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으로 나의 논의를 모두 마친다. p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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